네팔 요리사 프라밧
돈벌러 온 인도, 기다리는 건 천민만 못한 멸시
넉살 없어도 요리 못 해도 마음 씀씀이는 ‘진국’
‘인도의 알프스’라는 마날리의 온천마을 비쉬쉿의 담마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도착 첫날은 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너무나 배가 고파 미처 식당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델리에서 마날리까지 12시간 걸린다던 차는 도중에 히말라야의 고지대에서 고장 나 20시간 만에야 도착했다. 중간에 짜이를 몇 잔 마시긴 했지만 차 안에서 워낙 추위에 떨었더니, 으스스 추워오는 게 몸살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닭국물과 야채를 넣고 끓이는 티베트 국수인 뚝파를 주문했다. 시장기가 심해 맛 타령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간장 맛만 진할 뿐 아무 맛이 없었다.
국수 육수는 간장 맛만…‘시장’을 반찬삼으려 해도 안돼
프라밧은 그렇게 맛없는 뚝파를 만들어온 그 게스트하우스의 남자요리사였다. 요리사라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청소 등을 하는 가정부와 같다. 각 층에 방이 네 개인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였으니, 손님이 꽉 차도 10명 안팎이고, 대개 4~5명의 손님이 묵었다. 더구나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고 해서 그 안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프라밧의 요리 실력이 이러니 나 같은 초행자나 시킬까 이미 이곳에 며칠 머문 사람은 음식을 시킬 리 만무했다. 사람들이 요리를 시켜야 돈을 좀 벌 수 있을 텐데, 그런 요리 실력으로 돈을 벌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스물여덟 살의 프라밧은 네팔에서 돈을 벌러 이곳까지 왔다. 160cm 정도의 작은 키에 영어까지 서툴렀다. 인도엔 돈을 벌러 온 네팔인들이 많다. 인도도 거지가 넘쳐나는 나라이지만 네팔은 더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월경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인도의 천민들보다 더한 멸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2층 베란다에 나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찬서리가 내릴 만큼 추운 날씨에도 프라밧은 양말도 신지 않고 얇은 옷차림으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산을 넘어 조금 비치는 햇살 아래서 몸을 녹이며 한 갑에 4루피씩해 꽁초나 다름없는 최저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히말라야 안의 옛 도시 라닥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겨울이 가까워오면서 눈이 많아져 차편이 끊긴 상태였다. 그런데 때마침 라닥에서 넘어온 3명이 이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눈으로 길이 끊기면 델리까지 항공편으로 오가는 방법 외엔 길이 없는 그곳에서 길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탈출했다고 했다.
에스키모처럼 중무장했으면서도 타고 있던 지프차 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여전히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과 라닥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인근 꿀루 계곡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야채 가게를 들렀는데, 배추와 무 등 눈에 익은 야채가 많았다. 그래서 함께 요리를 해먹기 위해 야채와 밀가루를 사왔다.
갖은 구박하는 주인집 소의 진자리도 마른자리로
덜컥 재료를 사오긴 했지만, 부엌을 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구나 첫날 뚝파를 시켜먹은 뒤로는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은 주제에 부엌까지 빌릴 염치가 없었다.
프라밧이 음식으로 수입을 올리지 못해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눈총을 받고 있음을 아는 처지였다. 주인은 카스트에서 상당히 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애써 품위와 권위를 과시하는 듯했다. 주인은 인근에 근사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20대로 보이는 그의 아들이 주로 하는 일 없이 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주인 행세를 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들도 프라밧을 하인 다루듯 했다.
이곳에서 프라밧이 받는 월급은 고작 1200루피. 우리 돈으로 3만원밖에 안 되는 돈이다. 아무리 인도라지만 박하기 그지없는 월급이다. 그가 고향 네팔에서 1천루피나 되는 교통비를 들여 이곳까지 왔기에 그의 월급은 한심한 수준이다.
게스트하우스엔 조그만 텃밭과 외양간이 딸려 있다. 프라밧은 텃밭을 일구어 음식 재료로 썼고, 외양간엔 주인의 젖소가 있다. 프라밧은 매일 그 젖소의 우유를 짜 주인에게 대령했다. 그는 늘 젖소에게 풀을 먹였지만, 그는 우유를 맛도 보지 못했다.
내 방은 2층 끝방이어서 베란다에서 나와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 외양간과 소가 바로 보였다. 주인의 그런 박대에도 그가 젖소를 돌보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틈만 나면 젖소에게 달려가 풀을 먹이고, 소가 눕는 자리의 습기가 차지 않도록 마른 풀을 깔아주곤 했다.
그리고 젖소가 풀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젖소의 목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젖소는 그에게 주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그의 자녀 같은 느낌이었다.
소도 그의 정성에 보답하듯 탐스런 젖꼭지에서 신선한 우유를 쏟아냈다. 그러나 주인 부자는 프라밧이 남몰래 젖소에게 들이는 정성도 모른 채 우유맛을 즐길 뿐 그를 더욱 더 괄시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을 알기에 선뜻 부엌을 쓰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영업장소를 빌려 요리를 해 먹겠다는 말을 하려니 절로 머리가 긁적여졌다.
염치불구하고 “부엌 좀 빌릴 수 있나요?”
“부엌을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의아하게 쳐다볼 줄 알았던 프라밧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어보였다.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의 말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설산보다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져왔다. 이곳에서 더 깊은 히말라야 로탕패스쪽으로 1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올라가면 뀐줌라가 있었다. 뀐줌라엔 티베트 불교의 전설적인 고승 아티샤 대사의 흔적인 발자국을 간직한 사원이 눈 속에 서 있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오네.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오네.
아티샤 대사의 <입보리행론>의 향기는 프라밧의 마음을 통해서 더욱 잘 느껴져왔다.
난 맛있게 요리를 했고, 프라밧에게도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더욱 가까워진 프라밧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묻자, 고향에 아내와 1년 6개월 된 아들과 자신이 9살 때 홀로된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아내가 예쁘냐”는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예쁘다”고 했다.
머나먼 인도까지 온 그는 어서 빨리 돈 5천루피를 벌어 말을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게 꿈이었다. 우리 돈으론 13만원에 불과했지만 그에겐 희망의 돈이었다. 그래서 그 말로 농사를 지어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와 행복하게 살 날을 꿈꾸고 있었다.
우리가 부엌을 쓴 사실을 안 주인은 음식값보다 비싼 부엌사용료를 요구했고, 난 주인에게 사용료를 주었다. 프라밧이 문책을 당하지 않았으면 했기에. 물론 프라밧에게도 남몰래 ‘성의’를 표했다. 음식도 못하고, 손님에게 너스레도 못 떠는 그는 그런 팁마저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듯 눈이 토끼만해졌다. 난 그런 그가 점점 주인의 눈 밖에 더욱 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바쉬싯을 떠난 지 몇 달 뒤 그곳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프라밧이 결국 그 집을 나와 바쉬싯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네팔인들을 볼 때마다 인도 하늘을 떠돌 프라밧이 생각났다. 프라밧이 말 한필을 사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 cho @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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