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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순례기

무작정 올라 탄 기차에서 ‘메뚜기’ 신세

등록 2009-09-28 14:55

좌석도 ‘카스트’…가장 싼 칸엔 짐승과 ‘합승’

눈 깜빡하면 ‘도선생’…자물쇠·개고리 ‘필수’

 

 

무턱대고 기차에 올랐다. 내 여행은 이런 식이다. 어느 누가 날 위해 좋은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려 줄 것인가.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난 타고 싶을 때 타고, 내리고 싶을 때 내린다. 그건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나만의 자유니까.

 

인도에서 도로는 비좁고 엉망인데 비해 철도망은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 기차역에선 30루피에 기차시간표가 자세히 기록된 책을 판다. 그래서 이 책만 볼 줄 알아도 여행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승객은 날로 늘어나고, 그에 비해 기차는 적다 보니 장거리 여행을 위해선 한달 전,  적어도 일주일 전 예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떠나고 싶을 땐 지체하지 않고 떠나는 버릇이 있는 난 그렇게 예약해 본 적이 없다.

 

대기자엔 하루 두번 배정…아니면 귀퉁이에서 날밤

 

대기자표를 사서 기차 플랫폼에 서 있으면 차장이 예약자 가운데 오지 않은 좌석을 대기자에게 배정해 준다.  이곳에서 차장으로부터 탑승을 허락받지 못해도 난 탑승을 포기한 적이 없다.  무조건 올라타고 본다.

 

인도의 기차엔 카스트가 있다.  1A 2A 3A. A는 에어컨을 나타낸다. 에어컨이 있는 1등칸, 2등칸, 3등칸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각 칸별로 1A엔 침대 2개,  2A엔 침대 4개,  3A엔 침대 6개가 놓여 있다.

 

내가 주로 이용한 것은 그 밑의 SL이다. 슬리퍼 클래스다. 양쪽에 3층으로 6개의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아래로 ∥, P가 있지만 침대가 아니어서 단거리를 다니는 빈곤층들이 주로 탄다.  ∥는 세컨드 클래스로 불리는데 딱딱한 좌석만 있고, P는 패신저로 불리는데, 사람도 타지만 소나 염소 같은 짐승도 합승한다.

 

기차의 등급이 분명히 나뉘어 있는 셈이다.  100km를 기준으로  1A가 100루피인데, 내가 타는 SL은 10루피(250원 가량)로 10분의 1 가격인데다, 에어컨 칸이 아니어서 창문을 열 수 있기에 바깥 공기를 마음껏 들이킬 수 있어 내겐 금상첨화다.

 

좌석을 배정받지 못한 채 나처럼 무턱대고 차에 오르면 빈자리를 찾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배정해주는 빈좌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도 중부 도시 푸네역에서 남부 께랄라주 트리반드롬까지 40시간이 걸린다. 남의 자리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힘든 여행은 내가 자초한 것이다. 기차 좌석이 있는 날까지 며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느긋함이 내겐 없었다. 떠나고 싶으면 당장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역으로 가 대기자표를 사서 무작정 기차를 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자리 귀퉁이에서 날 밤을 새우는 업보를 받아도 할 말은 없었다.

 

물론 눈치를 살펴야 했다. 수십시간씩 장거리 여행을 하자면 혼자 눕기도 좁아터진 침대에 다른 사람 엉덩이까지 거치적거리면 누구나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밀히 상등칸에 진입하니 근엄한 표정의 아리아인이…

 

더구나 인도의 기차 안에선 분실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방마다 칸이 막힌 1A 2A보다는 막혀 있지 않은 하등칸에서 사고가 잦다. 하등칸에 탄 외국인들의 가방은 ‘도선생’들의 애호품이다.

 

일단 분실하면 찾을 방법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인도 여행에선 개고리와 자물쇠가 필수품이다. 가방이나 배낭을 침대 밑에 넣은 뒤 침대 다리에 개고리를 엮어 자물쇠를 채워둔다.

 

푸네역을 출발한지 하루 밤 동안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느라 비몽사몽으로 보냈다. 그나마 귀퉁이를 앉도록 허용한 사람들 덕분이다. 하나같이 하층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다음날 오전에도 좌석을 받지 못했다. 이왕 좌석이 없는데, 이쪽 칸에서만 전전하는 것 보다 상층 칸으로 진출해보고 싶었다. 옆은  2A칸. 빈자리가 많았다.

 

세자리 중 두자리가 비어 있는 좌석으로 가 앉았다. 오랜만에 남의 자리 귀퉁이가 아닌 좌석에 온전히 앉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 옆엔 한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하얀 아리안족이었다. 잘 차려 입은 것으로 보아 귀족 계층으로 보였다.

 

계층을 나타내는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아도 척 보면 어느 계층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상위 계층은 하얗고,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에 근엄하고도 자상한 표정을 짓는다. 옷을 잘 차려 입고, 기품이 넘친다.

 

하층민은 거의 예외 없이 얼굴이 검다.  B.C 1500년께 페르시아 즉 오늘날 이란쪽에서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침략해 아리안족과 토착 제사장들이 결합해 브라만(성직자) 등 상류층이 되고, 얼굴이 검은 토착민인 드라비다족을 하층민으로 전락시켰다.

 

아리안은 고대 이란에 정착해 스스로 ‘고귀한 존재’란 뜻으로 아리안이라고 불렀다. 이란과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다. 인도에서 살기 좋기로 손꼽히는 교육도시인 푸네엔 이란인들이 요즘 많이 건너오고 있다. 미국에서 비자를 잘 내주지 않자 이곳으로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조상은 인도의 최상위 카스트다. 그러니 힌두교의 카스트에선 이란족은 우수하고, 원래 인도족은 하등하다고 분류할 수 있는 것일까.

 

‘차장도 아니면서’ 했지만 슬그머니…

 

“좌석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옆 좌석의 중년 여성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것은 마땅히 차장이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자기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땐 서로 표를 보며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빈 자리에 앉는데, 자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왜 묻는데요?”

 

그는 내 대꾸에 내 좌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당신 좌석으로 가라”고 말했다. 아주 기품 있고, 준엄하게.

 

기품 있는 아리안족은 언터쳐불(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는 외국인과 한 자리에 앉으면 부정이라도 탄다는 것인 듯 했다. 보통의 인도인들은 외국인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골수 힌두교 상위 카스트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외국인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야, 수드라 등 네 개의 카스트에 해당되지 않으니 힌두교에선 수드라보다 낮게 취급된다.

 

인도에선 하층민은 상층 카스트에게 부당하게 두들겨 맞아도 항변조차 못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처럼 슬금슬금 피해야 하는 것이 그녀에겐 마땅한 일인 듯했다.  마님의 호령에 절대 복종하는 마당쇠처럼.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찌 그 만을 탓할 수 있으랴. 그는 자신의 오랜 관습에 젖어 자신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정작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기 싫어 영구임대아파트와 아파트 문조차 달리 다는 나라에 사는 내가 어찌 인도를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인권 상황을 가장 비난하는 인권 경찰 미국은 차별 정도가 아니라 토착 인디언들의 씨를 거의 말리지 않았던가.  인권 운동을 지원하고, 자선사업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의 이해를 침해당했을 때는 전국민의 94%가 테러 보복 전쟁을 벌여야한다고 하지 않은가.

 

차장이 지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꼭 그녀가 신고를 할 것 만 같았다. 무심히 그녀 앞을 지나 내 칸으로 돌아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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