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편견 `공해'없는 장애인공동체사랑도 먹거리도 무공해 맘과 몸 '무병'
서울에서 경기도 포천, 백운산계곡을 지나 광덕고개를 넘으면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화악산 자락에 엉성한 것 같으면서도, 멋스럽게 2층으로 지어진 돌집이 눈에 들어온다. 스스로 만든 명함에 '촌놈'이라고 써놓은 임락경(57) 목사가 30여명의 장애인들과 더불어 공동체로 살아가는 시골교회다.
중증 장애인 30여명이 사는 여느 복지시설 같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야 하는 장애인들 때문에 병원을 오가는 승합차와 운전기사를 따로 두어야 한다. 그런데 시골교회엔 다운증후군과 정신지체, 지체장애 등 중증 장애인이 많지만, 지난해도, 올해도 병원에 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난해 든 약값은 회충약을 사기 위해 쓴 7천원이 고작이란다. 어찌된 영문일까?
닭과 사슴이 뛰노는 우리가 있는 마당을 지나 봄볕이 쏟아지는 돌집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 안에서 가족들이 두세명씩 어울려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낮 12시 즐거운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거동이 좀더 나은 이들이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아 앞을 못보는 재민(20)씨와 잘 걷지 못하는 가족들의 앞에 가져다주고, 자기 것도 담아 자리에 앉는다. 쌀만 인근 유기농가에서 가져올 뿐 식탁에 오른 밥 속의 잡곡들과 배추, 무, 당근, 감자, 콩나물 등 채소들과 양념들은 모두가 이곳 8천평의 밭에서 가꾼 것들이다. 국도 직접 기른 돼지 고기에다 이곳 된장공장에서 만든 된장을 넣어 끓였다. 임 목사는 농사를 지은 이후 한번도 농약과 인공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니, 완전 무공해 식탁인 셈이다. 화천 일대에선 소문이 날 만큼 임 목사는 민간 의료로 병을 잘 고치기도 하지만, 그는 가족들이 건강을 되찾는'비결'로 식용유와 라면, 과자 등 인공 첨가물이 들어간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다는 점을 첫째로 꼽는다. 이곳에선 간식조차 직접 생산한 달걀과 꿀 등을 먹는다.
정신지체 장애인 연수(26)씨는 3년 전 이곳에 처음 올 때만 해도 관절염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고도 이런 식생활만으로 지금은 닭모이를 주며 임 목사를 도울 만큼 건강해졌다. 온갖 치료를 받아도 악화되던 간경화로 고생하다 5개월 전 이곳에 온 고선주(40)씨는 하루종일 토하기만 해 제발 물이라도 마셔 갈증이나마 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2개월 만에 구토가 그치고 지금은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있다.
임 목사는 다운증후군이나 뇌성마비,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수명이 짧다는 말도 낭설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방을 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유아 때 들어와 이곳에서 자란 정신지체 장애인 태은(22).진경(26)씨, 온 지 7~8년 된 다운증후군 원석(30).봉수(31)씨는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물론, 이들의 환한 웃음이 먹거리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임 목사가 중증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어려움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냉대 속에 아픔을 겪어온 장애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한가족처럼 살아가는 이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선 누구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생활도 모두 함께 한다. 임 목사와 이애리 원장과 자원봉사자들은 모든 식사와 간식을 장애인들과 한자리에서 나눈다.
그가 이렇게 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폐병환자와 고아들을 모아 돌보다가 자신도 폐병으로 숨진 (맨발의 성자)의 주인공 이현필(1913~64) 선생의 동광원을 찾았을 때 원장과 봉사자들이 자신의 자식들과 고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지내게 했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 목사는 마치 독신 수도자처럼 살고 있다. 왜 그런 삶을 사느냐고 묻자 그는 "오늘 아침에도 한 아이가 장가보내 달라고 떼쓰더라"는 말로 에둘러 답했다. 장애인들의 고통이 부족에서 온다기보다는 소외감에서 온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장가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장애'의 그림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밝고 환한 웃음을 지니고 있는 비결이 햇살 아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화천/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그들과 함께 하는 임락경 목사는....
민간치료법 명의수준 '돌파리 잔소리' 펴내 '손벌리지 않겠습니다'
임락경 목사는 `돌파리'다. 그가 민간 치료의 경험을 모아 최근 쓴 책의 이름도 (돌파리 잔소리)(호미 펴냄)다.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를 일컫던 돌파리와 선무당 같은 이를 가리키는 돌팔이 가운데 어느쪽도 상상은 가능하다.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 행세하기 돌팔이로 불릴 수 있지만 그를 아는 이는 "환자들을 잘 고치면 명의라고 하지만, 임 목사는 아예 병이 나지 않게 하는데, 누가 진짜 명의냐"고 묻는다. 어려서 이현필 선생, 그리고 나환자 요양원을 설립해 운영한 최흥종 목사, 김준호 선생 등을 따르며 결핵환자들을 돌보고 1970년대엔 경기도 장흥에서 실직자 숙소를 운영하며, 농민운동을 했던 했던 임 목사는 이곳 인근에서 군대생활을 한 인연으로 80년대 초 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장애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돌보는 이 없는 어린 장애인은 자신의 아들.딸로 입양했고, 가족이 있는 장애인은 그 가족과 함께 받아들여 지금과 같은 공동체를 이뤄냈다. 정부의 인가를 받으면 경제적 사정이 나아질 수 있지만, 가족이 있는 장애인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가를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이현필 선생의 삶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낙제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사랑을 불태우다 간 그의 스승의 정신은 그의 삶 곳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유기농 콩으로 빚은 시골 된장과 간장과 직접 산에서 딴 꿀만으론 생계 유지에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남에게 손벌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 선생의 실천적 삶의 영향이다. 시골교회의 삶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공무원들이 어떻게든 허가를 내 지원을 받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는 "나중에 굶어 죽게 되면 얘기할테니 도와 달라"며 웃고 만다. 너도 나도 '잘난 사람'과 '명인'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용을 쓸 때 그는 여전히 '촌놈'과 '돌파리'로 남아 있다. (033)441-4298. 조현 기자
(한겨레신문 2002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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