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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농장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의 ‘다른 삶’이 시작됐다

등록 2020-06-03 12:59수정 2021-05-07 16:38

[애니멀피플] 르포/새벽이 생츄어리 입주하던 날
6개월에 도살되는 농장 돼지와 달리 곧 1살 되는 새벽이
100㎏ 몸집 걸맞은 새 삶터에서 진흙목욕 ‘본능’ 되찾아
지난해 7월 경기도 화성시 한 종돈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가 5월25일 새 삶터인 ‘새벽이 생츄어리’에 도착해 수박을 먹고 있다.
지난해 7월 경기도 화성시 한 종돈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가 5월25일 새 삶터인 ‘새벽이 생츄어리’에 도착해 수박을 먹고 있다.

돼지가 진흙 웅덩이에 몸을 뉘이자 곳곳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조심스레 웅덩이에 다가간 돼지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흙물에 코를 담갔다. 자연스레 모로 누워 웅덩이에 몸을 비비더니 반대편으로 몸을 뒤집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렇게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더니 코로 웅덩이 주변 흙을 살짝살짝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활동가들은 조용해졌고, 몇몇은 훌쩍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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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케이지 벗어나 100평 보금자리로

국내 최초로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가 평생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5월25일 오후 경기도 한 지역에 마련된 ‘새벽이 생츄어리’에 몸무게 100㎏이 넘는 아기 돼지 새벽이가 도착했다. 100평 남짓한 쉼터에 도착한 돼지는 배를 채우자마자 진흙을 뒤집어쓰고, 생츄어리(Sanctuary·농장동물 안식처) 곳곳을 코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장 돼지다운 행동이었다.

새벽이는 지난해 7월 경기도 화성시 한 돼지농가에서 공개구조(Open rescue·오픈 레스큐)된 돼지다.(▷관련기사:국내 최초 ‘돼지 생츄어리’의 탄생…1호 입주자는?) 새벽이를 구조한 동물권단체 디엑스이코리아(DxE Korea·이하 디엑스이)는 공장식 축산 실태를 드러내기 위해 농장·도살장 현장에 들어가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디엑스이 활동가의 품에 안겨서 구조된 아기 돼지. 디엑스이서울 코리아 제공
지난해 디엑스이 활동가의 품에 안겨서 구조된 아기 돼지. 디엑스이서울 코리아 제공

이날 새벽이의 생츄어리 입주는 충북 충주시에서 시작됐다. 25일 오전 10시 한 동물권단체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 앞에 말 운반용 트럭이 나타났다. 2시간여 동안 새벽이의 이동을 책임질 차량이었다. 생후 2주차에 구조된 뒤 새벽이는 구조 직후 디엑스이 활동가 집에 머물렀지만, 몸집이 커진 뒤 지난해 겨울부터는 유기견들과 함께 이 보호소에서 지내온 터였다.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평소 말이 탔을 트레일러 안을 지푸라기로 소복이 감싸기 시작했다. 이동 차량을 준비하는 한편, 아기 새벽이와 두 달 넘게 ‘동거’를 했던 디엑스 향기 활동가는 새벽이의 상태를 체크했다. 부쩍 힘이 세지고, 고집이 생긴 새벽이가 차량에 쉽게 오르게 하기 위해 오전 8시부터 금식을 시켰기 때문이다. 향기 활동가는 몸을 낮춰 새벽이와 코 인사를 나누고 작은 사과 조각을 내밀었다. “새벽아, 배고프지. 이제 얼른 이사가자.”

5월25일 디엑스이 활동가들이 새벽이의 이사를 위해 동선을 상의하고 있다.
5월25일 디엑스이 활동가들이 새벽이의 이사를 위해 동선을 상의하고 있다.

리허설이 시작됐다. 디엑스이 활동가 6명과 보호소 직원 등이 가림막을 들고 좁은 통로를 만든 채 구령을 맞췄다. 새벽이가 다른 곳으로 벗어날 수 없게, 활동가들이 케이지에서부터 트럭 트레일러까지 길을 만든 것이다. 두어 번의 연습이 더 이어지고, 드디어 새벽이가 머물던 케이지의 철창이 열렸다. 향기 활동가가 가림막 통로에 서서 수박을 들고 새벽이를 유인했다. 긴장된 순간은 30초 만에 지나갔다.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새벽이는 아무 말썽 없이 수박을 따라 트럭 위로 순식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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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만난 새벽이…“행복한 돼지는 더럽다”

오후 1시 새벽이가 드디어 여생을 보내게 될 쉼터에 입주했다. 널따란 공터 곁에 초록색 울타리로 구분된 ‘새벽이 생츄어리’는 경기도 한 지역의 부지를 임대해 마련됐다. 새벽이의 새 이웃은 닭과 말, 개들이었다. 새벽이 생츄어리 바로 옆 비닐하우스에서는 닭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디엑스이 섬나리 활동가는 “동물을 좋아하는 땅 주인이 닭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키우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 사는 반려견들도 새벽이가 신기한지 연신 울타리를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생츄어리에 도착한 새벽이는 배를 채우자마자 진흙목욕을 시작했다.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생츄어리에 도착한 새벽이는 배를 채우자마자 진흙목욕을 시작했다.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생츄어리 내부는 새벽이가 평소 쉴 수 있는 집과 볕을 피할 그늘막, 진흙목욕을 할 수 있는 웅덩이 등으로 꾸며졌다. 새벽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커다란 공과 펀치볼 등을 매달아 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본 새벽이는 생각보다 크고 빨랐다. 거침없이 울타리로 다가와 사람 손에 코를 대기도 하고, 강아지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새벽이의 코는 촉촉하고 단단했다. 향기 활동가가 생츄어리 공간을 소개하듯,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자 새벽이는 강아지 마냥 그를 쫓아 여기저기를 뛰기 시작했다.

생츄어리 곳곳을 탐색하며 코 인사를 나누기 바쁜 새벽이.
생츄어리 곳곳을 탐색하며 코 인사를 나누기 바쁜 새벽이.

활동가들이 미리 마련해둔 고무대야 속 과일을 야무지게 해치운 새벽이는 바로 물웅덩이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진흙목욕이었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행동이지만, 물웅덩이에 몸을 뉘인 새벽이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땀샘이 없어 스스로 체온 조절을 못하는 자연상태의 돼지들은 하루에 10여 차례 이상 진흙목욕을 한다. (▷돼지는 하루에 15번까지 진흙탕 목욕 즐긴다) “행복한 돼지는 더럽다”는 돼지 연구자의 말처럼, 활동가들이 공들여 다져놓은 언덕을 마구 파헤치는 새벽이의 모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 보였다.

디엑스이 은영 활동가는 생츄어리 내부를 무엇보다 새벽이가 돼지로서의 야생성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진흙목욕을 할 수 있도록 수도 공사를 새로 했어요. 얕은 곳과 깊은 곳, 물 웅덩이를 세 곳을 준비했고, 새벽이가 스스로 흙을 파면 보물처럼 발견할 수 있도록 돼지감자도 땅속에 숨겨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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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0.5㎏씩 자라나…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구조 직후 2개월 넘게 집에서 새벽이를 보호했던 향기 활동가는 새벽이에게 ‘경외감’을 느꼈다고 했다. “새벽이 계정의 에스엔에스(SNS)를 본 많은 분이 ‘귀엽다’고 해요. 코 촉감이 어떠냐, 부르면 이름을 알아듣느냐 이런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새벽이가 사람을 무는 야생성이 나타나더라고요. 태어나자마자 농장에서 이빨이 뽑혀서 뒤늦게 자라난 치아지만 굉장히 힘이 셌어요. 아, 돼지는 강한 동물이구나. 사람이 가둬놓아서 약해진 것뿐. 무섭고 경외감이 들었죠.”

성장기에 접어든 새벽이는 하루에 0.5㎏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아직 어린 모습의 새벽이.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성장기에 접어든 새벽이는 하루에 0.5㎏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아직 어린 모습의 새벽이.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새벽이가 하는 ‘꾹꾹이’도 사실은 흙을 파는 동작이었다. 새벽이는 종종 사람 손에 코를 대고 위아래로 흔드는 행동을 했다. 활동가들은 이 모습을 ‘꾹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신기하게도 이 행동은 흙이 있는 장소에 가서는 없어졌다. “코로 흙을 들춰내려는 본능이 있었던 거예요. 흙이 없으니까 손에 대고 했던 거고. 그걸 알고 나서는 굉장히 미안했어요.”

사실 새벽이의 생츄어리 조성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지난해 공개구조 당시 계획했던 보호 계획 1, 2안이 차례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돼지를 입양하겠다는 개인 구조자에게 입양을 보내는 방안과 말과 소 등 여러 동물이 생츄어리와 비슷하게 어울려 사는 농장에 보내는 방안이 마련됐었지만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을 찾다 보니 활동가의 집과 동물권단체 보호소가 임시 거처가 된 것이다.

지난겨울 본격적으로 성장기에 접어든 새벽이는 실내에서 지내기 힘들 정도로 자라났다. 최근에는 하루에 0.5㎏씩 몸무게가 늘어날 정도로 나날이 커졌다. 보호소 견사도 새벽이의 덩치에는 비좁기 시작했다. “새벽이가 눈앞에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했어요. 아마 새벽이가 없었다면, 자원 많은 다른 동물권단체들이 생츄어리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을 거예요.” 4월 말 본격적인 생츄어리 건립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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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동물 생츄어리 제대로 마련되려면…

돼지의 자연수명은 10~15년이다. 농장에서 축산물로 키워지는 돼지들이 6개월이면 도살장으로 실려 간다. 내달 1살이 되는 새벽이는 얼마 전부터 다른 돼지들이 누리지 못한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2년 동안 200㎏ 이상 자라나는 성인 돼지에 비하면 100㎏ 남짓한 새벽이는 사실 아직 아기다.

5월27일 한 도살장 앞 트럭에 6개월령으로 추정되는 돼지들이 가득 타고 있다. 서울애니멀세이브 제공
5월27일 한 도살장 앞 트럭에 6개월령으로 추정되는 돼지들이 가득 타고 있다. 서울애니멀세이브 제공

디엑스이 효경 활동가는 “격주로 비질(Vigil·도축장, 농장, 수산시장 등을 방문해 동물이 겪는 일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일)을 가서 만나는 도살장 앞 수많은 돼지를 볼 때마다 새벽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3주간 이탈리아 피사의 ‘이파시(ippoasi) 생추어리’에서 봉사를 했던 그는 당시 체험을 모든 동물이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새벽이를 보며 ‘돼지’라는 생명에 대해 다시 연결되었으면 좋겠어요.”

전에 없던 농장동물 구조 그리고 생츄어리 건립이기에, 현실적 한계점도 있다. 추후 생츄어리에 입주하는 동물들의 수가 늘어나거나, 쉼터 규모가 커질 경우를 대비한 관련 규정이나 적정한 사육, 관리에 대한 규정이 현재로써는 미비하다. 농림부 관계자는 “국내에는 농장동물의 생츄어리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된 것은 없다. 돼지이긴 하지만 1마리를 키운다고 하면, 가축이 아닌 반려동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답변만 내놨다.

새벽이는 아침마다 주변 땅을 파헤치며 흙냄새를 즐기고, 미리 심어뒀던 돼지감자 뿌리를 몽땅 먹어버렸다는 소식이다.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새벽이는 아침마다 주변 땅을 파헤치며 흙냄새를 즐기고, 미리 심어뒀던 돼지감자 뿌리를 몽땅 먹어버렸다는 소식이다. 디엑스이 코리아 제공

새벽이가 생츄어리에 입주한 지 열흘이 되어가는 3일 현재, 디엑스이는 ‘새벽이 생츄어리’ 옆 부지를 다듬는 확장 공사에 매진 중이다. 새벽이는 아침마다 주변 땅을 파헤치며 흙냄새를 즐기고, 미리 심어뒀던 돼지감자 뿌리를 몽땅 먹어버렸다는 소식이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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