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짓밟는 감정노동 ② 트라우마
6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지난달 31일 자살한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최종범(향년 32)씨의 형 최아무개씨(35)가 마이크를 잡았다. “동생의 죽음에 회사는 사과해야 합니다.” 죽은 최씨의 부인 이아무개씨도 곁에 있었다. 감정노동의 고통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호소했던 최씨가 세상을 뜬 지 일주일, 유족들은 산업재해 심사 청구나 손해배상 소송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사과라도 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고객의 불만 접수 때문에 사장에게 모욕을 당한 녹취록이 공개된 최씨가 ‘산재 사망자’로 기록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감정노동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고 관련 법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병든 감정노동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 감정노동자에 대한 회사의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고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추진되며 ‘마음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6월 법원은 판결을 통해 ‘감정노동으로 인한 직업병이 심각하며 여기에는 회사 책임이 있음’을 처음으로 분명히 했다. 서울 남부지방법원 민사단독8부(재판장 이예슬)는 에스케이(SK)텔레콤 고객센터에서 일하다가 부당하게 항의하는 고객,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하라는 회사 등에게 모멸감을 느끼고 사직서를 낸 뒤 자살을 시도한 조아무개(32)씨에게 “회사가 73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듯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노동, 이른바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근로자의 경우 우울증, 대인 기피증 등 직무 스트레스성 직업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감정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는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폭언에 대하여 근로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을 추진 중이다. 한명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에 이어 8월에도 ‘감정노동 산재’와 관련한 ‘산업안전보건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주요 내용은 “고객의 폭언, 폭행, 무리한 요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함”, “사업주는 근로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고 치료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등 감정노동 산재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사업주의 의무에 대한 조항들이다. 한 의원은 “현행법은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에 관한 규정이 없어 감정노동자의 건강장해를 치료하기 위한 국가와 사업주 차원의 지원이나 조치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정신적 외상에 대한 현대의 고전적 저서 <트라우마>(1997)에서 주디스 허먼 하버드대 교수는 “트라우마를 인정하는 것은 사회의 인권 수준과도 관련돼 있다”며 이런 ‘폭력’을 종결짓기 위해선 정치적이고 공적인 행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우울장애, 공황장애 등에 대해 폭넓게 산재 보상이 되는 유럽이나 전문가 집단의 산재 승인 기준이 탄탄해 감정노동자들이 보호받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감정노동자의 산재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희박하다”고 말했다.
임지선 남은주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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