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미소짓던 감정노동자들은 일과가 끝난뒤 탈진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노동자이자 고객으로 ‘과도한 친절’과 ‘과도한 학대’를 오가며 황폐해졌다. 출구는 없을까. 감정노동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국에서도 최근 몇년새 감정노동 수당을 신설하는 사업장이 나타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서비스업종이 폭증한 현대 사회에서 감정노동 자체를 없앨 순 없지만 그 폐해는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감과 연대, 사업주와 고객의 인식 변화는 이를 위한 작은 시작이다. <마음을 짓밟는 감정노동> 기획의 마지막회에서 희망의 선례를 따라가본다
걸레를 가져다 책상에 쌓여있던 먼지를 닦는데 웃음이 나왔다. “책상 생겼다고 이렇게 좋아해야 돼?” 멋쩍게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건네는데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지난 11월11일 이선희(43)씨는 입사하고 4년 만에 사무실에 자기 책상을 갖게됐다. 365일 24시간 운영되는 서울시의 ‘120 다산콜센터’ 저녁조 상담원인 그는 그동안 매일 오후 6시에 출근해 그날그날 다른 자리를 배정받아 새벽 1시까지 일해왔다.
회사에겐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인간 건전지’, ‘시민님’들에겐 샌드백이었다. “백화점 앞에서 집회하는데 어쩔거냐. 쇼핑하는 데 방해가 된다.” 오후 6시. 동료가 쓰던 헤드셋을 귀에 끼기 무섭게 성난 전화가 걸려온다. “당장 25개 구청에 전부 전화해 안내데스크 직원이 유니폼을 입는지 알려달라.” 막무가내 전화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24시간 돌아가는 실적 현황 모니터가 그들의 통화시간을 재고 있었다.
딸 셋을 낳은 그는 첫째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하던 일을 그만뒀다. 일년 뒤 다시 취업에 나섰지만 경력단절 여성에게 시간제이면서도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을 찾기란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중 서울시에서 운영한다는 ‘120 다산콜센터’를 알게됐다. 서울시민에게 도움을 주는 일인데다가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일 듯 했다. 위탁업체를 통해 다산콜센터 저녁조 상담원으로 파견됐다. 오후 6시에 출근해 새벽 1시까지 근무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친절한 선희씨’는 날이 갈수록 지쳐갔다. 악성 민원이라 해도 “시민의 말을 주의 깊게 끝까지 경청”해야 하며 이는 ‘경청도’점수로 매겨졌다. “여자 친구에게 어떤 속옷 선물이 좋겠느냐”는 전화에도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해야 했다. “어린 아이까지 전화해 자신이 시민이고 당신은 상담원이니 나에게 깍듯이 대하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말하더라고요.”이씨의 자존감은 한없이 무너졌다.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인터뷰 조사에서 많은 다산콜센터 상담원들은 “늘 눈물을 참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감정 압박, 자존감 상실, 우울감 등 감정노동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상담사들은 민원인들의 불편을 해결해주며 보람을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간접고용된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은 쉽게 무시되고 혹사당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발휘해야 하는 ‘친절 항목’은 무한정 늘어왔다.
2007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문을 연 ‘다산콜센터에는 각종 업무가 쏟아져들어왔다. 2007년 시립미술관, 서울대공원 등 산하 기관 콜센터가 통합됐고 8월부터 365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8년부터 야간 상담과 ‘홀몸 노인 안심콜 서비스’를 실시했고 2011년에는 보건소까지 통합돼 현재 다산콜센터의 업무 분야는 430개에 달한다. 상담원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은 없지만 매달 엄격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법정공휴일은 물론 주말 근무도 빈번했다. ‘상담 대목’인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마친 뒤 저녁에 출근을 해야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그만뒀다. 이씨도 “이 일을 오래하진 못하겠다”고 체념해갔다.
그러던 지난해 9월, 이선희씨는 회사 앞에서 전단지 한장을 받았다. 동료 몇몇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소식이었다. ‘노조’란 말이 무서웠다. 그러나 세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콜센터 노동자가 30만명, 대부분이 여성이라는데 제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니 이대로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 길로 노조에 가입했다. 처음으로 같은 사무실 동료와 인사를 나눴다. ‘투쟁’이란 말도 어색했던 그가 지난 여름에는 ‘다산콜센터의 근로 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서울시청 앞에 섰다. 이씨는 그날을 “실적 경쟁을 버리고 인간적인 자부심을 되찾은” 날로 기억한다.
현재 다산콜센터 노조에는 3개 위탁업체에 소속된 500여 상담원들 중 300여명이 가입한 상태다. 7%까지 치솟았던 월별 퇴사율은 노조 결성 뒤 1%대로 떨어졌다.
서울시도 직접 문제 해결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11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에 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지난달 15일 서울시 인권위는 ‘120 다산콜센터 감정노동 및 고용실태’에 대해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동안 상담원들이 못받아온 초과 근무 수당, 연차도 쓰기 힘든 강제 노동 환경, 시험과 가혹한 성과관리 등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한 문제들에 조치를 취했고 일부 진상 고객에 대해서는 고발도 했다”고 밝혔다. 이번달 안에 서울시 인권위원회는 다산콜센터 상담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권고문을, 서울시는 다산콜센터를 포함해 민간위탁에 맡겨놓은 서울시의 업무에 대한 ‘서울시 일자리 로드맵’을 만들어 발표할 예정이다.
자기 책상을 갖게 된 이선희씨는 자리에 좋아하는 그림 한 장을 붙였다.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져 상담하다 힘들 때면 큰 도움이 돼요.” 그는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기로 했다. “초단위로 기록되는 평가를 잊고 상담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대기 콜에 신경쓰느라 아이의 첫 어린이집 입소를 앞둔 한 엄마의 간절한 전화에 대충 답하고 끊어버린 적이 있어요. 수당을 못받게 되더라도 이제 그런 상담은 하지 않으려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은 거짓 미소나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안내이니까요.”
미국의 경영학자 베첼러가 쓴 논문 <감정노동:고객 행복과 직원 만족의 비결>에선 “직원이 친절하길 원한다면 자신의 업무에 만족하도록 만들라”고 당부한다. 진상 고객에 치이고 업체의 감시와 경쟁 속에 소진되어 가던 다산 콜센터 노동자들은 이제 희망을 말한다. “어디부터 바꿔야 할지 막막할 다른 감정노동자들이 우리를 보고 모델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선희씨의 말이다. <끝>
임지선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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