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 해원과 진상규명을 위한 304편 연작시’를 시집으로 묶어 최근 펴낸 나해철 시인.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나해철(60)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문학과 행동)은 이런 부제를 달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해원과 진상규명을 위한 304편 연작시.’
2014년 4월29일 시작해 2015년 3월29일 304번째 시로 끝난다. 실종자 등 세월호 희생자는 모두 304명이다. 11개월 동안 시인은 거의 매일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가해자를 떠올리며 슬픔과 분노 그리고 사랑의 노래를 토해냈다. 지난 9월29일 서울 구로동의 한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세월호’ 이후 11개월 동안 304편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시집 내
“세월호는 무구조, 고립 등에서
대학생때 겪은 광주와 닮아
광주때 시쓰기 잘못한 것 후회
의사 삶에 숨은 지난 세월 반성도”
시인은 단풍을 보고 곱다고 말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올봄 이래로 앓아오던 하늘의/ 가슴이 찢겨 흘러/ 인간의 거리와 숲을 물들이고 있다’(단풍) 부끄럽고 무기력한 정치권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한다. ‘단원고 학생들이 걸어온다/ 바다의 멱살을 잡아 쥐고 온다 (…) 학생들이 여의도까지 도착하면/ 국회는 바다에 잠기리/ 뒤집혀 침몰한 국회의사당에서는/ 한 사람도/ 탈출하지 못하리’(아아!) 고립된 유족의 심정에 다가가기도 한다. ‘여기 한 남자 있어/ 운다/ 새벽에도 울고/ 한밤중에도 운다/ 그러나/ 까마귀보다 못해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다’(까마귀)
“한 명의 시민, 아버지, 지식인, 시인으로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게 바로 시쓰기였습니다.” 이런 결심을 고광헌 시인에게 말하자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해보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바로 페북 계정을 열었다. “밤늦게 시를 썼어요. 새벽 1~3시쯤 슬픔이 극한으로 몰아치는 정신적 상황을 경험하지요. 그때 시를 썼죠. 새벽에 당시 제가 살던 서울 번동 ‘북서울 꿈의 숲’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주량 이상으로 과음해 몸을 상하기도 했죠. 팽목항에도 10번은 같죠.”
추모시를 쓰는 행위와 11개월 동안 304편을 쓰는 행위는 분명 다른 일이다. 왜 그랬을까? 시인은 ‘광주민주화운동’과 ‘반성’이란 말을 꺼냈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원이 쇠몽둥이로 광주의 시위학생을 내리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전남대 의대 본과 4학년이었다. 그도 몸을 숨겨야 했다. “쫓기면서 입고 있던 결혼식 예복 상의까지 벗어던져야 했죠.” 그는 광주항쟁 한달 전에 결혼식을 치렀다. “광주와 세월호는 닮았어요. 광주 때도 구해주는 이는 없었고 언론은 딴소리를 했죠. 그때 티브이는 미인대회 중계방송을 내보냈어요. 세월호 유족들의 고립감도 광주와 비슷합니다.”
나해철 시인의 세월호 연작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광주천’ 연작은 그가 광주항쟁에 대해 쓴 시다. 이 작품은 82년 등단한 그의 첫 시집 <무등에 올라>(창비, 1984)에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곽재구, 최두석, 박몽구 등과 함께 5월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동인 가운데 제가 가장 먼저 광주시를 썼어요. (그런데) 시를 잘못 썼어요. 시에서 빨리 (광주의 상처를) 치유하자고 했죠. 시가 투철하지 못했어요.” 이런 얘기도 했다. “(세월호를 겪으면서) 이 참혹한 시대에 대한 예술적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광주항쟁도 대표하는 시집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김준태 시인이 <광주일보>에 발표한 시 정도만 기억하지요. 후세의 정신사적 공간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예술적 분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시인은 세월호 연작이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현장에 몸 바치지 못하고, 의사의 삶에 숨어버렸죠. 시인으로서도 투철하지 못했고요.” 그는 대학 졸업 뒤 서울 강남 지역에서 25년 동안 성형외과 개업의로 살았다. 20년 동안 운영해온 압구정동 병원을 지난해 닫고 지금은 구로동에서 동료 6명과 함께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술이 비즈니스의 영역이 되면서 압구정동에서 마지막 10년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환자 유치를 위해선 광고나 인터넷 홍보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병원 문 닫는 시간에 광고판 불도 켜놓지 않았어요. 적자가 누적돼 6개월 동안 월세가 밀린 적도 있어요. 병원이 한가한 덕에 세월호 시도 쓸 수 있었죠.”
그는 “한국적 상황에서 개업의란 위치가 시인으로서의 진정성을 약화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고 했다. “문단에선 저를 먹고살 만한 존재로 보고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문단과 의사 사이 중간에 떠 있는 존재죠. 하지만 장점도 있어요. 홀로 사유하기엔 좋은 조건이죠.”
그는 전남 나주 영산포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엇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을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섬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어요. 집을 나가면 한참 뒤에 돌아오시곤 했죠. 어머니를 많이 기다렸어요. 아버지는 억압적이셨죠. 아버지의 형과 사촌형 7명이 좌익 활동에 연루돼 죽음을 맞은 게 평생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독서밖에 없었어요. 중3 때 교지에 투고한 글이 뽑히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죠.”
그는 ‘사랑을 시작하는 동생에게’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이 네 첫사랑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광주를 겪은 뒤 이 시가 나왔죠. 세상이란 표현은 광주의 대동세상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부모들 대신 울어주겠다”는 의도로 쓰인 그의 세월호 연작시 역시 대동세상을 위한 염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족들이 그러더군요. ‘고맙다. 당신의 시를 보고 울고 웃는다’고요.”
그는 올해만 두차례 몽골을 다녀왔다. “(다음 시집에서는)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