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누나>(tvN)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나영석 피디와 이우정 작가의 여행 예능은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캐릭터, 사건으로 시작해 수습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낯선 장소, 세가지로 요약된다. <꽃보다 누나>(tvN)의 전작 <꽃보다 할배>가 ‘직진 순재’ 등 할배들의 캐릭터에 따라 상황을 예측하거나 반전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면, <꽃보다 누나>는 이들의 여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짐꾼을 자처하고 나선 이승기가 거대한 ‘짐’이 되면서, 누나 각자의 캐릭터보다 이승기를 돕는 누나들의 팀워크가 눈에 띈다. 이서진이 헤맬 때면 할배들은 기다려줬지만 누나들은 그러지 않는다. 물론 ‘여행지에서 헤매기 지수’가 0부터 10까지 있다 치면, 이서진이 ‘2’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한다면 이승기는 ‘8’ 무렵에서 그 선을 넘나들기 일쑤라 그렇긴 하겠지만. 하지만 이 때문에 누나들의 여행이 흥미롭다. 여행책에는 써 있지 않은 반전, 난감함, 좌충우돌을 겪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므로. <꽃보다 누나> 편을 보면서 사람들이 유독 자신의 여행을 돌아보거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손으로 꼽아보니 벌써 10년도 전의 얘기다. 2002년 겨울이 끝날 무렵 네 여자가 한 달을 예정으로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누가 만든 일정을 따라 움직이는 여행이 아닌, 모두에게 생애 첫 배낭여행이었다. 준비를 할 때부터 주변에선 그래도 유럽이 낫지 않겠느냐, 낯선 나라에서 일정이 너무 길지 않으냐, 음식은 입에 맞겠냐 걱정이 산을 이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는 알량한 여행책 두 권에 기대 여행을 준비했다.
그곳에서 해탈을 하고 오겠노라, 거창한 목표도 세웠다. 물론 철학적 소양이 깊었던 것은 아니고 골치 아팠던 연애 문제 따위를 털어버리고 오겠다는 정도였는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났다면 진작에 이렇게 말해줬을 텐데. 정신 차려 그 남자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어쨌거나 내 힘으로 떠나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경비는 빠듯하기만 했다. 몰래 용돈을 쥐여주는 부모님도 있었지만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누구의 조력을 받지 않고 각자 같은 비용을 손에 쥐고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인도에서 한 달 동안 쓰고 돌아오기로 약속한 돈이 1인당 40만원인가 그랬다. 비상금도 없이 떠나는 미련함이라니. 홍콩을 경유해 하룻밤 머무는 비행 일정이었는데, 우리는 인도 물가만 계산해 예산을 세웠으므로 홍콩 숙박비에 펄쩍 뛰며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홍콩 공항에서 어영부영 한해의 끝을 보내고 인도에 도착해 새해를 맞았다. 첫 여정지였던 델리의 한 시장에서 설빔인 양 전통 의상을 맞춰 입었다. 어쩌다 고른 게 비슷한 디자인에 색깔도 같아 넷이서 그렇게 차려입고 다니면 엄청 눈에 띄었다. 상인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면 “포 에인절스”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애초에 비싸게 부른 것이겠지만 물건 값도 막 깎아줬다. 그렇게 여행 초반 며칠 호시절을 보내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부터 호객 행위가 심해 질려버린 우리는 일정 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갠지스강 유역의 바라나시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때부터 일정은 뒤죽박죽이 됐다. 계획에 없었던 곳에서 한참을 머물고, 가기로 했던 곳에는 가지 않았다. 현지인의 소개로 간 한 식당은 너무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밥 먹다 정신을 잃고 눈 뜨니 신장 하나가 사라졌더라는 여행 괴담이 떠오르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음식의 절반을 먹고 무탈해야 나머지 두 사람이 남은 것을 먹었다. 하지만 식당 주인은 선량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우리는 멀쩡하게 식당에서 걸어 나왔다. 그곳에서의 한 달은 그랬다.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부딪히고, 실패하고, 실수하고, 바가지 쓰고, 때로 위협을 당하고, 도움을 얻고.
그러니까 그때 우리는 네 명의 ‘이승기’들이었다. 지금은 ‘언니’들이 된 우리들에게 그때의 여행을 다시 하라면 손사래를 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승기’들일 때 그런 시간을 보낸 게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가끔 한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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