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모두 잠든 후에 거실에 나가면 종종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누가 고요한 밤 텔레비전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뒀나. 범인은 누구인가. 우리 집에는 20·30대에 걸친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살고 있다. 개와 고양이, 이놈들도 가끔 지들끼리 싸우다 바닥에 놓인 리모컨을 밟아 티브이를 켜곤 하므로 용의선상에 넣는다. 그중 여자 한 명은 나이므로 제외한다. 넷이 남았다. 남자 둘과 동물들 중 누구인가. 홀로 웅성대고 있는 채널을 보면 수사망은 좁혀진다.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을 때 나오는 기본 채널인 1번이 켜져 있다면 개·고양이 중 한밤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한 마리가 뒷걸음질을 치다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20대 중반, 남동생이 주로 보는 채널은 <올리브티브이>와 <온스타일>이다. 그의 애청 프로그램은 <테이스티 로드> <노 오븐 디저트>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 <스타일 로그>. 30대 중반의 남편은 서사에 몰두한다. 중반 이상 영화가 흘러가 있어도 곧잘 이야기에 빠지고, 봤던 영화 다시 보기도 잘 하는 그가 아끼는 채널은 <채널씨지브이> <오시엔>(OCN). 혹은 황당한 사연을 들고나와 한 보따리 풀어내는 예능 프로그램 <안녕하세요>를 자주 재방송해주는 <케이비에스엔>(KBSN)도 그가 자주 보는 채널이다. 깊은 밤,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재방송 중인 티브이에서는 사랑이가 먹방을 찍느라 바쁘다. 범인은 바로 당신이었군!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채널이 세분화하면서 즐겨 보는 채널은 그 사람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반영한다. 우리의 선호 채널이 세대와 성별을 대표하지는 않겠지만 가족들 간에도 서로 다른 채널을 선택하는 것이 흥미롭다. 얼마 전 아버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비타민시(C)에 관해 한참 말씀하시다 수화기를 내려놓으셨다. “채널에이에서 봤는데, 어떤 의사가 나와서 자기 건강 관리 비결은 비타민시를 복용하는 거라고 하더라. 하루 권장치를 훨씬 넘게 먹는데,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보니까 너무 건강해. 너네도 한번 챙겨 먹어봐라.” 집에 내려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소파에 앉으면 종합편성채널(종편)에 티브이가 종종 머물러 있곤 했다. 아버지는 종편 시사 프로그램은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종종 본다. 유독 건강 관련 주제를 다루거나 이름이 가물가물한 연예인이 등장해 자신의 시절에 관한 ‘썰’을 풀어가는 프로그램이 많은 종편에 대해 <한겨레21>은 997호에서 이렇게 썼다. “종편의 극우적 정치에 공감하지 않는 중·장년도 자신의 시대와 함께했던 이들이 등장하는 방송을 보면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확인한다. … 그래서 종편은 일종의 향수 산업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식들보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텔레비전을 보며 위로를 얻거나, 애잔한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음식과 패션을 다루는 채널을 선호하는 남동생의 티브이 사용법은 좀 다르다. 그에게 종편은 <마녀사냥>(JTBC) 정도만 빼고는 너무 구세대적이다. 텔레비전의 일방성에 길들여져 있는 이전 세대에 비해 좀 자유로운 편이기도 하다. 그는 ‘본방 사수’와 거리가 멀다. 자신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결코 무슨 요일, 몇 시에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남동생의 티브이는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활발히 교류한다. 누군가 업로드하는 ‘짤방’이나 유튜브 링크를 타고 프로그램의 엑기스만 뽑아 보곤 한다. 이동 중이나 다른 일을 하면서 짧은 동영상을 보는 데도 익숙하다. 때때로 화장실에서 웃음이 터져나올 때도 있다. 그의 텔레비전은 결코 거실에 머물지 않는다. 손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스마트폰 안에 있다.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머물러 있는 티브이에서 움직이는 티브이로. 점점 더 작게 쪼개지는 텔레비전을 본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켜놓은 텔레비전을 끄기 위해 리모컨을 집어 드는 새벽이 내게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공유하던 시대가 점점 더 멀어져간다. 한때 중산층의 유물로 한껏 과시되던 텔레비전은 몇 십년 만에, 홀로 티브이를 보는 이를 겨우 붙들고 있거나 먹통처럼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 검고 거대한 물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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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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