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프로그램 <요리 인류>.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실을 발목께에 마구 얽어놓은 것 같은. 무슨 일을 하든 의도와 상관없이 발에 턱턱 걸려 고꾸라지는 나날들. 만우절 즈음을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회사일도, 개인사도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다. 속이 상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몇 정거장을 일찍 내려 걸어보아도 기분은 여전히 별로다. 잘근잘근 누구를 씹어 삼키려 들어도, 왜 나는 그때 제대로 화를 내지 못했지? 곱씹게 돼 뒤늦은 후회만 돌아올 뿐이다.
마음은 의외의 순간에 풀렸다. 모두가 잠든 시간, 불 꺼진 거실에 텔레비전만 밝게 빛난다. 이 미련하게 크고 환한 기계는 혼자 줄기차게 떠들 뿐 나에게 아무런 대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반쯤 마음을 놓은 다음 남은 화를 달래줄 어조의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헤맸다. 아이피티브이(IPTV) 지나간 방송 목록에서 <요리 인류>가 걸려들었다. 국수 면발을 이으며 전세계 음식 문명사를 탐구했던 <누들로드>를 연출한 이욱정 피디가 참여한 프로그램으로 총 8부작 중 3월26~28일 세 편을 방영했다.
다큐멘터리는 이른바 요리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1편은 <빵과 서커스>. ‘빵과 서커스’는 고대 로마에서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눈을 사로잡는 요소만 제공하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유명한 비유다. 당시 사회 부패상을 풍자로 비웃었던 시인 유베날리스가 한 말이다. 그렇게, 빵은 고대 로마에서 황제가 시민의 환심을 얻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기도 했고, 사하라사막에서 유목민이 생존을 위해 뜨거운 재 속에 밀반죽을 넣어 익혀 만드는 일용할 양식이기도 했고, 아이슬란드에서는 뜨거운 온천수를 이용해 독특한 빵을 만드는 지혜의 산물이기도 했다.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가루가 뒤섞여 반죽이 되고 열을 가하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식이 탄생한다. 방송은 빵의 종류를 달리하며 그 과정을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아무리 반복해 봐도 단시간에 재료들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어가는 과정이 놀랍기만 하다. 프랑스 명인이 크루아상을 만드는 과정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반죽에 버터를 넣고 접은 다음 밀대로 밀어 반죽과 버터가 층을 이루도록 한다. 숙성 과정을 거치고 모양을 만들어 오븐에 넣으면 반죽이 부풀어올라 초승달 모양의 크루아상이 완성된다. 내레이션을 맡은 황인용 아나운서는 “마치 꽃이 피는 모습과 같다”고 말한다.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 작은 폭발을 앞둔 모습과 꼭 닮은 그 과정이 마음을 움직인다. 봄꽃을 보며 절로 함박웃음이 터지듯, 빵이 부푸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꼬리에서 미소가 새어나온다.
2편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는 향신료에 담긴 인류의 욕망을 다룬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열매를 기르고 수확해 짙은 향의 향신료를 만들기까지, 향료의 사용이 인류의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등을 다룬다. 돈 혹은 권력의 다른 말로 대치되기도 했던 향신료에는 복잡하고 풍부한 향만큼이나 많이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3편은 고기 한 점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한 인류의 역사를 짚었다. ‘생명의 선물, 고기’ 편에서는 밀이나 쌀과 같은 탄수화물 대신 육류와 채소만 먹는, 이른바 구석기식 식사를 추구하는 요리사가 등장한다. 줄기차게 빵을 먹으며 문명의 서막을 열어왔던 인류를 다뤘던 1편과 대비돼 흥미롭다. 동토의 땅에서 몇 시간 동안 올가미를 던지며 순록과 다툰 끝에 일용할 양식을 얻는 러시아 툰드라 지역의 주민,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 힌두교인들의 닭요리인 탄두리 치킨, 축제의 순간 생과 사의 경계를 나누는 에티오피아의 도축 장면, 우리만큼이나 소의 내장을 다양하게 조리해서 먹는 프랑스인 등 지구 곳곳에서 고기를 먹는 다양한 방식을 촘촘하게 들여다봤다.
프로그램은 주문처럼 이런 말을 되뇌었다. “요리는 마법과 같다. 같은 재료라도 요리사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마법을 지켜보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절실한 도구인 반면 누군가에게는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쓰였던 그 음식들이 만들어낸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사소한 다툼 따위는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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