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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늦은 밤, 혼자라고 느낄 땐 TV를 켜자

등록 2014-01-03 19:30수정 2014-01-05 11:39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책상 앞에 놓인 달력을 바꾸었다. 해가 바뀌었다 해도 사람이 바뀌지는 않는 법이다. 역시 오늘도 회사에서 마감을 하다 정리되지 않은 자료와 문장들을 가방에 쑤셔 넣고 퇴근을 했다. 올해는 “5분만”, “10분만”, “잠깐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니까 게으름을 덜 피우고 반나절 일찍 마감을 당겨,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한 나날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새해 결심이었다. 1월1일이 주말을 끼고 있었더라면 어영부영 작심 3일이라도 되었으련만 마감을 코앞에 둔 수요일이었던 새해 첫날부터 나의 결심은 무너져 내렸다.

일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날에는 여러 의식을 거쳐야만 겨우 회사에서 싸들고 온 노트북을 열 수 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간식을 주섬주섬 주워 먹는다거나,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영수증 정리, 휴대전화로 인터넷 서핑 따위의 킬링타임을 거쳐 밤이 아주 깊어 더이상 할 일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어야만 겨우 쓰다 만 문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번 시작했다 하면 새벽 이슥한 시간까지 끝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 참을 수 없는 적막을 깨고 텔레비전을 켜면 그날은 동이 틀 때쯤에야 일을 마칠 수 있으리라 스스로 예고편을 쓰는 것이다.

시계 초침이 내는 소리와 리듬을 맞춰 타닥거렸던 키보드 치는 소리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판 위를 떠난 손은 슬금슬금 티브이 리모컨을 더듬었다. 그렇게 새해 첫 주부터 새벽 텔레비전 시청은 시작되었다. 새벽의 티브이에서 ‘유레카’는 없다. 이제까지 재미를 몰랐던 프로그램을 발견하기 위한 에너지 따위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보고 또 봤던 드라마, 화질 상태가 좋지 않은 오래된 여행 프로그램, 누군가 “어제 그거 봤어?”라며 웃음과 함께 흘려줬던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은 것을 붙들고 보는 것이다. 때때로 몇 장면을 놓쳐도 조바심이 나지 않는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는 시청, 티브이의 효용이 극에 달하는 시간이다.

1월2일 새벽의 티브이는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였다. 오래전부터 여타 프로그램에서 좋은 궁합을 보였던 신동엽과 이영자, 라디오 프로그램 <컬투쇼>를 진행하는 김태균, 정찬우 조합은 뾰족한 구석이 없는데다, 절반은 라디오를 닮은 이 프로그램은 한밤의 시청에 특히 잘 어울린다. 원고를 쓰다가 엉뚱하고 황당한 사연이 들리면 혼자서 큭큭대는 시간도 왠지 비밀스럽고 즐겁다. 딸을 살뜰히 챙겨주기보다는 딸의 집을 오히려 친청집 삼아 반찬부터 화장품까지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가져가는 친정엄마 때문에 고민인 주부, 시도 때도 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남편 때문에 고민인 아내, 연애 8년차임에도 여자친구의 애정이 도를 넘어 철두철미한 감시로 발전해 괴로운 남성의 사연 등 때때로 과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일상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사연을 들으며 나와 우리의 생활을 빗대어보고 소소한 삶의 방식들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헤아려보니 새벽에 티브이 보는 버릇이 10년도 훨씬 넘었다. 혼자 살던 시절, 전화할 친구도 가족도 모두 잠들었을 새벽에 나는 티브이를 켰다. 새벽의 라디오가 밤의 적막함을 강조한다면, 티브이는 때때로 그것을 깨줘서 좋았다. 눈치 없이 번쩍, 섬광이 일어나거나 와르르 쏟아지는 웃음소리 같은 것들은 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 나의 조그만 방을 밤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 어둠으로부터 나를 지켜줬다. 지금은 밤이 무서워지면 흔들어 깨울 사람이 옆에 있고 생활은 안온해졌지만 티브이를 가장 사랑하게 되는 시간, 새벽의 시청은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것 같다. 야심한 밤 불현듯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티브이를 켜보시길, 쓸데없거나 쓸모있거나 시시하거나 진지하거나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거기서 조용히 끓고 있다.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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