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시>(BBC) 제작 다큐멘터리 <스파이 펭귄>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안 돼! 가서 풀이나 뜯어 먹으라고!” 설 연휴 티브이 앞에 앉은 가족들이 소리를 질렀다. <비비시>(BBC) 제작 다큐멘터리 <스파이 펭귄>이 설을 맞아 <케이비에스>(KBS)에서 재방영 중이었다. 가족들의 외침은 포클랜드에 사는 바위뛰기 펭귄의 새끼를 낚아채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독수리를 향한 것이었다. 사냥에 실패해 몇날 며칠을 굶주렸을 독수리의 주린 배에는 아랑곳 않고 온통 주인공 펭귄 떼에 감정이입을 했다. 이들의 새끼가 단 한 마리도 해 입지 않는 것이 이 순간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하지만 생태계의 섭리는 잔학무도하다. 장면이 바뀌고 독수리는 기어이 새끼 펭귄 한마리를 발톱에 걸었다. 바위틈 둥지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독수리가 거죽에 솜털만 덮인 이 여린 동물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장소를 바꿔 이번에는 몽골고원이다. 마침 1월30일 방송된 1편 ‘알타이의 제왕 검독수리’는 독수리의 생태와 그들과 교류하는 몽골 사람들의 삶을 보여줬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에서 하늘 아래 사는 동물들은 수시로 위를 올려다본다. 아무리 경계해도, 태양을 등진 거대한 그림자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림자가 활강을 시작하면 그곳의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해진다. 미끄러지듯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날카로운 발톱이 닿는 곳은 지상을 뛰놀던 동물의 목덜미다. 심장이 터질 듯 숨을 곳을 향해 달렸어도 소용이 없다. 선량한 눈으로 애처롭게 쳐다봐도 최상위 포식자에게 자비란 없다. 독수리는 그렇게 사냥을 하고 그렇게 먹이를 얻어 새끼를 먹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독수리가 주인공으로 나섰지만 <스파이 펭귄>을 볼 때 펭귄에게 감정이입했듯 결코 이 잔학무도한 동물의 삶을 공감하는 지경까지는 닿질 않는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를 견디기 위해 수백마리가 몸을 붙이고 뭉쳐 서로의 품에 머리를 파묻은 채 계절을 견디는 펭귄 떼나, 앞으로 닥칠 위협은 모른 채 고원에 핀 노란 꽃을 정신없이 따 먹는 쥐토끼 같은 여린 동물의 삶이 우리 사는 것과 더 닮은 것 같아서다.
독수리의 세계는 수평의 평화는 없고 생존을 향한 수직의 경쟁만이 있는 곳이다. 어미가 먹이를 구해 오면 둥지에 있는 새끼 독수리 중 덩치가 큰 녀석이 먼저 어미 앞에 가서 입을 벌린다. 먹이는 먼저 와 입을 벌린 새끼에게 먼저 배급된다. 공평하게 나눠 먹는 일 따위는 없다. 먼저 먹는 새끼가 배가 불러야만 그다음 차례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늘 둘째는 배를 곯는다. 같은 날 알을 깨고 나왔지만 앞서 먹은 녀석보다 덩치도 훨씬 작다. 독수리의 생존 경쟁은 둥지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서 어미의 사냥이 여의치 않을 때면 형제 살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덩치 큰 새끼 독수리는 어미가 없는 틈을 타 작은 녀석을 공격한다. 어미가 먹이를 물어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동생이 기진맥진해 죽기 일보 직전이 될 때까지 부리로 쪼아댄다. 먹이가 부족한 상황에서 맹금류에게 늘 있는 상황이란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은 이 포악한 동물에게도 때로 두려워할 존재가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먹잇감인 펭귄이나 쥐토끼를 닮은, 단단한 부리나 날카로운 발톱도 없는 인간들이다. 방송은 6천년 전부터 검독수리를 길들여 메마른 땅에서 삶을 이어온 몽골고원의 사냥꾼들의 삶도 함께 조명했다. 목청껏 유~우후 하는 소리를 바람에 실려보내면 독수리가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날아온다. 30년 경력을 검독수리 사냥꾼 사일루한과 이제 막 새끼 독수리를 거둬 초보 사냥꾼의 길에 들어선 그의 아들 하지므라트, 그리고 그들의 독수리 타스틸로크와 발라판의 얘기다.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인 독수리는 야생에서 혼자 살아갈 능력을 잃기 때문에 인간과 잘 교감해야 하고 동시에 예전의 사냥 본능도 잃어서는 안 된다. 뭉쳐야 힘이 세지는 연약한 동물을 닮은 인간에게 결국 지배당하는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것이다. 그래서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이들의 돌고 도는 공생 관계를 보면서, 그런 생각도 잠깐 하게 되는 것이다. 제왕적 포식자가 되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지상의 쥐토끼 같은 존재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는.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연과 닮은 삶을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다는.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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