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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늦은 밤 고요를 채우는 ‘감성변태쇼’

등록 2013-03-22 19:41수정 2013-07-15 16:14

<유희열의 스케치북>(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KBS2)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어릴 적 동네 피아노학원에 다닐 때 하루는 선생님이 엄마를 호출했다. 전공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엄마는 집에서 듣기엔 뚱땅거리기만 하는 것 같은데, 웬일인가 싶었단다. 하지만 듣고 보니 설득하는 선생님의 길고 긴 말 중에는 내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다만 연습실에서 엉덩이 붙이고 잘 앉아 있으니 이런 지구력으로 승부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저런 핑계로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뒀다.

어쨌거나 이후로 나는 음악에 별 재능도 없고 심지어 노래도 못해서 음악과는 별 상관없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잘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노래 잘하고 악기 잘 다루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다. 몸의 사소한 부분들을 이용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한겨레21> 편집팀에 있을 때 금요일에는 대체로 자정을 넘겨 퇴근을 했는데, 운이 좋게 조금 일찍 퇴근한 날에는 <유희열의 스케치북>(KBS2)을 볼 수 있었다. 노래와 연주를 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애정 어린 무대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특히 자꾸만 보게 되는 이유는 출연자들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게 느껴져서였다.

음반을 내고 새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한 눈을 찡긋거리며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노래가 익숙지 않은 출연자가 무대에 섰을 때는 행여 실수를 하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이 눈빛에서, 손끝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래 노래하고 연주한 베테랑 가수라 할지라도 긴장한 듯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마이크를 손에 쥐었던 것 같다. 무대를 채우는 이들의 애정 어린 설렘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노래 뒤에 숨어서 잔잔히 깔리는데,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매번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무대가 이런 떨림만으로 채워졌다면 아마도 이내 속이 울렁거려 끝까지 방송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공공연히 원초적 농담을 하는 유희열의 ‘변태지만 왠지 멋있는’ 진행 방식이 더해져서 프로그램은 기묘하게도 더 반짝인다.

음악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도 그 틈새로 스며드는 짓궂은 순간들이 무대 앞에 앉은 이들을 사로잡는 힘인 걸까. 예컨대 3월15일 방송에서 유희열은 새 노래 <이게 사랑이 아니면>을 들고나온 초대 가수 버벌진트와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해 11월2일 ‘Thanks to 유재하’ 편 출연 당시 버벌진트가 노래에 심취해 콧물을 흘렸던 장면을 굳이 확대 사진으로 준비해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늦은 밤 작은 목소리로 음악을 속닥거리면서 던지는 날이 서지 않은 농담들, 그 사이를 채우는 좋은 음악들,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또 한 주가 이렇게 마무리되었구나 안도감이 들면서 한 주를 편안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늦은 시간 깨어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지상파 심야 음악프로그램 가운데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니아층이 많고 완성도가 높음에도 <유희열의 스케치북> 또한 시청률이 2~3%대다.

제작진은 한 인터뷰에서 “방송 시간이 너무 늦고, 제작비가 적고, 작가 수도 부족해 제작 환경이 좋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했다. 직업인으로서 만드는 사람들의 고단함이 너무나 공감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하면 할수록 빠져든다”는 제작진의 말에 안도감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청자로서 조금만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지금으로서는 더 크다. 특히 금요일 밤이 다가올 때는 더더욱. 아이돌이 화려한 무대 대신 덤덤한 라이브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고, 악기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아 악기를 팔아버렸다는 연주가가 다시 한번 사람들 앞에 선다거나(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 한 선배 가수를 존경했던 후배 가수들이 모여 진지한 마음으로 무대를 꾸리거나(유재하 특집),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가 소중한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면 좋겠다.

제작진은 하나의 기획을 완성하기 위해 몇 달을 고생하기도 하고, 진행자는 진행자 겸 편곡자 겸 반주자 겸 때로는 기획자의 역할도 하면서 무대를 풀어간다지만 늦은 시간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오히려 더 많은 시도를 해보길, 오랫동안. 그러니까 어쨌거나 변태 같지만 모두들 파이팅.

<한겨레21>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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