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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누가 보수 아버지를 요리에 빠지게 했을까

등록 2013-04-19 19:25수정 2013-07-15 16:00

게국지
게국지
[토요판]신소윤의 소소한 TV
묵은지의 양념을 털어내고 깨끗하게 씻어 팔팔 끓는 멸치다시마육수에 넣었다. 김칫국인가? 아버지는 거기에 된장도 한 큰술 떠 넣었다. 김치된장국이란 것도 있나? 파를 굵직굵직하게 썰어 넣고 애호박도 숭덩숭덩, 냉동실에서 꺼내 해동시켜 놨던 게도 한 마리 집어넣고 폭폭 끓인다. 이게 뭐예요? “게국지라는 건데, 충청도에서 먹는 음식이란다. 나도 <최고의 요리 비결>에서 처음 봤어.” 충남 서산에서 주로 겨울에 많이 먹는다는 게국지는 원래 절인 배추에 늙은 호박과 꽃게를 넣고 담근 김치인데, 생으로 먹기보단 주로 찌개처럼 익혀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게국지는 냉장고 속 재료를 털어 만든 실생활 버전이랄까. 충남의 게국지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날 먹은 아버지의 게국지는 짠 듯하면서도 시원하고, 진한 듯하면서도 담백했다. 어쨌거나 맛이 좋았다.

<교육방송>(EBS) <최고의 요리비결>은 아버지의 레시피북이다. <최고의 요리 비결>이 아버지를 요리에 빠지게 했는지, 아버지가 슬금슬금 주방에 들어서서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요리 비결>을 즐겨 보게 됐는지, 무엇이 먼저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아버지는 토요일 낮 12시부터 2시간 반 동안 방영하는 1주일치 재방송을 몰아 보며 혼자만의 ‘쿠킹클래스’에 참여한다. 한동안 요리에 꽤나 심취해 계실 때에 본격적으로 요리학원에 다녀보시는 것은 어떻겠냐 여쭸는데, 종종 “나는 보수다”라고 말하는 이 시대 아저씨인 아버지는 “이 나이에 남자가 무슨”이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최고의 요리 비결>은 빠짐없이 보신다. 복습도 열심이다. 토요일엔 아빠가 <최요비> 요리사?

“멸치육수를 낼 때는 뜨거운 냄비에 멸치를 살짝 볶은 다음에 물을 붓고 끓이면 비린내도 나지 않고 구수하지.” “다시마는 아까워하지 말고 물이 끓으면 빨리 건져내야 해. 오래 물에 두면 끈적한 진액이 배어나오거든.” “해산물을 요리할 때에는 간장으로 간을 하기보단 멸치액젓을 좀 섞어주면 좋다. 바다에서 난 재료끼리 잘 어울리게 마련이지.” 음식을 만들 때 아버지 옆에 서 있으면 마치 나는 이것저것 질문하며 요리를 보조하는 진행자 윤형빈, 아버지는 시시콜콜 요리의 팁을 알려주는 이 주의 요리 대가 같다.

2000년부터 방영한 <최고의 요리 비결>은 10년을 훌쩍 넘어 버텨낸 장수 프로그램이다. 현재 지상파에서는 <최고의 요리 비결>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요리 프로그램은 없다. 이미 200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도 언제든지 쉽게 레시피를 검색할 수 있게 되면서 요리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부진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면서 대세로 떠오른 제이미 올리버, 고든 램지 등 외국 스타 셰프의 요리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상파 티브이는 여전히 끊임없이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다소 정적이고 조금 낡아 보이는 전통적인 방식보다는 여행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 안에 요리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럼에도 <최고의 요리 비결>이 옛 방식을 고수하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상성 때문일 테다. <최고의 요리 비결>에 등장하는 요리사들은 자신의 요리 솜씨를 화려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현란하게 칼질을 한다거나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가지고 나와 세상에 이런 요리도 있단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하기 쉬운 제철 재료로, 식탁에 늘 오르는 음식을 조금 더 맛있게 하는 비결을 알려줄 따름이다. 때로는 앞치마도 집에서 쓰던 물건인 듯 꽃무늬가 알록달록하기도 하고, 요리사는 오래 요리하며 투박해진 손을 화면에 여지없이 드러낸다. 쏟아지는 화려한 요리 사이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제대로 된 집밥이 더 그립고 애틋하다 여겨왔는지도 모른다. 요즘 요리 프로그램의 흐름과 다른 이런 소박함이 <최고의 요리 비결>의 힘이자 비결인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의 소탈한 요리 비결은? 이번주는 요리사 최진흔의 ‘지친 하루를 위한 충전 100% 음식’이 주제였다. 아마도 이번주에도 아버지는 토요일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채널을 돌리다 또 <최고의 요리 비결>에서 리모컨 누르던 손을 멈추시겠지. 마침 아버지가 좋아하는 해산물 재료가 많다. 주꾸미 철판구이, 삼치무조림, 묵은지멸칫국. 다음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저 세 가지 중 하나는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겨레21>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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