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KBS) <다큐멘터리 3일>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로드무비’(road movies)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24초 분량의 동영상을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1초, 2초, 혹은 3초짜리 동영상을 찍으면 앱이 이걸 알아서 이어 붙여준다. 배경 음악도 깔 수 있고 필터를 골라 색감도 조절할 수 있다. 완성을 누르면 앱이 촬영한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 마지막 프레임 뒤에 붙여준다. 찍을 때는 별것 아닌 장면들 같은데 완성해놓고 보면 뭔가 그럴듯하다. 같이 앱을 받은 옆자리 선배는 이런저런 것을 촬영하고선 홍상수 영화 같다, 왕가위 영화 같다 자화자찬했다. 재미가 붙어 한동안 이것저것 찍어댔다. 한번은 주말 일상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촬영을 마치고 앱이 계산한 시간과 거리를 보니 토요일 낮 1시12분부터 일요일 오후 4시45분까지 기록됐다. 촬영한 거리는 2㎞(이틀 동안 겨우 2㎞ 움직였다니). 찍고 보니 나와 남편은 주로 먹고 마시고 집에서 키우는 개, 고양이와 뒹굴고 밀린 청소를 하고 느지막한 오후에 산책을 나가 어슬렁거리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도 그랬고 일요일도 그랬다. 굳이 기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칸트의 시간표처럼 대체로 정해진 패턴대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이걸 왜 찍은 거지? 금세 재미가 없어졌다. 그런데 일요일에 집에 놀러온 친구가 찍은 동영상을 보니 다시 좀 흥미가 일었다. 친구는 나와 전혀 다른 컷들로 ‘주말 영화’를 채워넣고 있었다. 친구는 창밖 바람에 떠는 나뭇잎을 담고 일렁이는 촛불을 들여다봤고 심드렁한 내 표정 같은 걸 찍었다.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한국방송(KBS) <다큐멘터리 3일>도 아마 그런 기록이 아닐까. 같은 공간에 여러 명의 브이제이(VJ)들이 퍼져 그곳에 돌아다니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인물들도 방송을 들여다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매일을 보내는 공간이지만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생활의 한 조각이라든지,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반갑고 신선할 것 같다. 그 장소를 언젠가 지나쳤던 행인들도 그때 자기가 발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를 통해 만난다면 흥미롭겠지. 이 프로그램이 이 땅 구석구석의 사소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식의 일상 재발견이 가능하기 때문일 테다.
지난 주말(6월9일) 방송편은 정선 5일장에 대한 기록이었다. 매달 2, 7일에 열린다는 정선시장은 1966년 곡식과 생선을 팔던 작은 시장에서 출발했다. 1999년 관광열차가 운행되면서 전국에 이름이 나 지금은 장이 서는 날이면 상점 230여곳에 노점 160여곳이 더해지면서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산나물을 팔러 나온 할머니, 시장에서 오랫동안 쌀을 팔며 상인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는 할머니 등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북적이는 시장의 72시간을 들여다보며 티브이 앞에 앉은 이들은 마음에 품은 또다른 이야기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오시게 시장’을 생각했다. 지금은 번화한 거리로 바뀌어버렸지만 어릴 적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5일장이 섰다. 2, 7일인가, 5, 10일인가에 열렸던 것 같다.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장이어서 학교 받아쓰기 문제로도 가끔 나왔다. 시험에 나오기 전까지 나는 옷이랑 시계를 파는 곳이겠거니 ‘옷시계 시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정된 답을 보고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장이 서는 날이면 엄마는 가까운 슈퍼를 두고 굳이 차를 타고 그 시장을 찾았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번잡하기 짝이 없었지만 누군가 곱게 기른 채소, 뒤집은 솥뚜껑에 부쳐지는 개떡, 말린 누에 같은 것들이 노점을 채우고 늘어섰다. 몸이 약한 동생이 달여먹었던 말린 개구리, 커다란 가물치 같은 것들이 아마도 그 시장에서 온 것일 거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그때의 일상들, 남겨놓은 흔적도 그 순간을 함께 보냈던 엄마도 이제 없으니 아마도 그 시절과 공간에 대한 기억 또한 점점 모래알처럼 부서져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제보다 공들여 오늘을 기록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지난주보다 열심히 <다큐멘터리 3일>을 볼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선가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한겨레21>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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