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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용감한 탐험가들에게 박수를

등록 2014-02-21 19:28수정 2014-02-24 13:52

김연아 선수
김연아 선수
[토요판] 신소윤의 소소한 TV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처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왔다. 청소를 하느라 창문을 활짝 열어뒀는데, 겁이 많아 늘 창턱에 앉아 바깥만 구경하길래 별생각 없이 뒀는데 이날은 어쩐 일인지 창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래 봐야 밖으로 난 창턱까지 잠깐 다녀온 게 전부지만, 태어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제 발로 짧은 외출을 해보고 온 셈이다. 전리품으로 나뭇가지도 하나 물고 들어왔다. 먼지를 탈탈 털어 곱게 펴놓은 이불 위에 올려놨길래 얼른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조금 지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이 녀석이 쓰레기통을 엎어 나뭇가지를 꺼내 다시 침대 위에 가져다 놓은 게 아닌가. 생애 첫 모험, 어쩌면 꽤 의미 있었던 경험이었을 텐데 내가 너무 무참히 무시해버렸나. 사실 인간처럼 그 나뭇가지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겠느냐만, 어쨌거나 고양이는 이번 모험을 통해 다음에는 몇 발짝 더 낯선 세상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깨쳤을 것이다. 3년 내내 앞발을 들었다 내렸다, 그렇게 오래 머뭇거리다 처음 내디딘 한 발이었으니.

그리고 그날 밤.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나와 나의 동거인은 단 한번도 티브이 중계를 보지 않았다. ‘현상’이라고까지 불렸던 안현수의 경기도 보지 않았다. 재미를 느끼면 쉽게 빠져드는 우리는, 번번이 밤잠을 설치게 될 것이 뻔하므로 아예 티브이를 켜지 않는 미련한 방법을 택했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페이스북 등에 올라온 ‘짤방’을 보면서 소리 없는 환호성만 뒷북치듯 내질렀을 뿐.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김연아(사진)의 올림픽 경기 중계는 피할 수가 없었다.

사실 피겨스케이팅의 기술이나 경기 운영에 관해 아는 바는 거의 없다. 그러니 어떤 기술에 어떻게 판정이 내려지는지, 어떤 회전이 점수가 높고 어떻게 해야 가산점을 얻는지 등에 대해서도 깜깜하다. 이 정도면 몇점은 받겠다, 점수를 가늠하는 건 당연히 못하는 일이니, 이 아름다운 경기를 보면서 남는 시간 동안은 이런 공상이나 하는 것이다. 숱한 시간 망설이다 내디딘 첫 한 발이 모여 이토록 아름다운 경기를 펼치게 하는구나. 하얗게 반짝이는 넓은 얼음판, 그 위를 혼자서 모험하는 선수들. 텅 비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위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과 고비와 곤혹스러운 순간들이 놓여 있을까.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음악이 시작되면 빙판 위에 올라선 선수만이 볼 수 있는 난관들이 얼음판 위로 불쑥불쑥 솟을 것만 같다. 결전의 순간, 마음을 다잡고 뛴 점프가 무사히 원하는 장소에 자신을 착지시킬지, 행여 넘어지지는 않을지, 넘어졌다 일어났을 때 자연스레 다시 얼음을 지칠 수 있을지, 10번 중 2번쯤 실패했던 그 기술이 설마 이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안되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걱정, 불안, 두려움. 쇼트프로그램 2분50초, 프리프로그램 4분 동안 한 발, 한 발이 모험 같은 그 시간이 겨우 지나서야 선수들은 환하게 웃거나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터뜨린 환호와 울음은 아마 3분 혹은 4분의 경기 시간이 아니라 얼마나 긴 시간 참아온 것일까.

피겨스케이팅은 예선 점수를 무시하고 결선을 치르는 다른 경기와 달리 쇼트프로그램을 통과해 프리프로그램 경기를 펼치더라도 메달권에 드는 선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쇼트 점수가 합산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선수들 간에 격차도 꽤나 크기 때문이다. 메달권에 들지 못하더라도 자기와의 승부를 겨루는 데 열심인 선수들이 아름답다. 자신의 시즌 최고점을 넘어섰을 때의 환호성, 다음에 도전할 목표가 더 높아졌다는 뿌듯함,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기를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낸 다음 겨우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 같은 것들이 지켜보는 우리 코끝도 시큰하게 한다. 1등이든 24등이든 빙판 위에서 자신만의 모험을 떠나 무사히 고비를 헤치고 나온 이 용감한 탐험가들에게 박수를.

신소윤 <한겨레21> 기자 yoon@hani.co.kr

사진 소치/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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