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밀회’의 한 장면
이재익의 명대사 열전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이재익의 명대사 열전>은 드라마와 영화 속 명대사를 곱씹어봅니다. 요즘 ‘뜨는’ 대사뿐 아니라 오래된 작품의 명대사를 불러내 필자의 개성적 시선으로 요모조모 음미합니다. 첫회는 지난 5월 종영한 드라마 <밀회>입니다.
“내가 정말 미친 게, 세상이 다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세상이 다 감시자야. 다 눈이야.”
- 드라마 <밀회>중 혜원의 대사
드라마 <밀회>는 성공했다. 시청률로 봐도 그렇고 소위 대중문화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평가를 봐도 그렇다. 나는 <밀회>의 성공이 참으로 통쾌했다. 불륜, 그것도 스무살이나 차이 나는, 그것도 여자가 스무살 더 많은 커플의 이야기로 ‘고급스럽다’는 말을 들었으니. 처음 <밀회> 제작발표회 때 뉴스마다 달렸던 비난의 악플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불가능한 절도 행각에 성공하는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잔잔한 분위기의 색감과 음악으로 톤다운을 시키고 있으나, <밀회>의 본질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껍데기뿐인 부부생활과 커리어에 지친 마흔살 여자가 솔직하고 대담한 열정 앞에 겹겹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던지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핵심 테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의 대사들이 직설적이다. 현란한 수사와 상징이 아닌, 정갈한 진심을 담은 대사들이 유독 많은 드라마가 <밀회>다.
요즘 가장 유행하고 있는 대사는 “특급 칭찬”이다. 작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에게 해준 대사가 제대로 유행을 타고 있다. 정성주 작가가 중년의 여성이어서 그런지 선재의 대사보다는 혜원의 대사가 훨씬 더 와닿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골라본 명대사 역시 오혜원의 대사다.
11회에서 혜원은 선재와의 관계가 들킬 위험을 감지하고 일단 몸을 수그린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를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때 이런 대사를 한다. “내가 정말 미친 게, 세상이 다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세상이 다 감시자야. 다 눈이야.”
그렇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어버린다는 동서양을 막론한 표현은 연애의 상대를 향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사자 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에 대한 ‘실명’의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학교나 회사에서 나름 몰래 연애를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다 알면서 지켜보는 경우. 정작 당사자 두 사람만 ‘아무도 모르겠지?’ 하며 이미 들켜버린 비밀연애를 계속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가난과 기침처럼, 사랑도 숨길 수 없다고 했다. 들키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더 눈에 잘 띄기 마련이다. 행동이 어색해지니 어쩔 수 없지. 들킬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 앞에 속수무책인 것은 스타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여중생, 여고생들에게 나라 잃은 슬픔을 겪게 만들었던 엑소 백현과 소녀시대 태연의 열애만 해도 그랬다. 보도가 나가고 당사자들이 연인임을 인정하자마자 그간 팬들이 수집했던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니, 니들 다 알고 있었니? 정말 세상이 다 감시자고 다 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밀회>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 또 다른 사랑의 속성을 보여준다. 오혜원이 그 다음에 이런 대사를 던진다. “그런데도 선재가 보고 싶어.”
이런이런. 세상이 다 감시자고 눈이라 할지라도, 들켜서 곤란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망신당하고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해도 보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인간의 보호본능마저 거스르는 무서운 감정이란 말이다.
<밀회>의 재미는 이 대사 이후에 두 배로 증폭된다. 그전까지 이른바 불륜드라마(이런 표현을 쓰긴 정말 싫지만)의 관습적인 진행에 따르면, 들키고 난 뒤 주인공의 행보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뭇매를 맞거나 도피하거나. 그런데 <밀회>는 달랐다. 들켜놓고도 계속 저지르는, 감시자들 앞에서 대놓고 저지르는 불륜의 뻔뻔함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둘의 사랑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밀회>의 대단함이었다.
숨어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명심하라. 세상이 다 눈이다. 그래도 괜찮아야, 그래도 보고 싶어야 사랑이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 드라마 <밀회>중 혜원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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