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익의 명대사 열전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 영화 <친구> 중에서 좋은 대사의 기준은 시대와 매체에 따라 다르다. 수십 년 전에는 명대사로 회자되었던 말이 지금 보면 촌스러운 경우도 있고, 반대로 요즘 명대사로 추앙하는 대사들을 수십 년 전에 썼다면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확률도 크다. 스크린 위의 명대사, 티브이 드라마에서의 명대사, 연극 무대 위에서의 명대사 또한 기준이 다르다. ‘요즘 영화’로 한정한다면 명대사의 제1기준은 ‘생활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할 법한, 완벽한 구어체의 말이어야 한다는 거다. 사극이야 시대 배경이 다르니 제외하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 “살아있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너나 잘하세요”, “살려는 드릴게” 등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기막힌 대사라며 흐뭇해 했던 경우는 대부분 우리 생활에 그대로 써도 무리가 없다. 이런 식의 생활어 대사들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했던 영화로 나는 두 편을 꼽는데, <연애의 목적>과 <친구>다. 생생한 영화 대사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분에게는 두 편을 꼭 추천해드린다. 그중에서도 <친구>는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명대사를 국민유행어로 만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 하와이 가라” 등 요즘도 종종 패러디되는 명대사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대사는 뭐니뭐니해도 요놈이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조직 내의 암투로 서로 칼을 겨눈 두 친구. 극 중 유오성의 사주로 똘마니가 장동건의 배를 마구 찌르는데 장동건이 단말마로 중얼거리는 말이다. 서울말인 문어체로 풀어보면 이쯤 되지 않을까? “이제 그만 찔러. 너무 많이 찔려서 나는 꼼짝없이 죽을 테니.”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모두 안다. 그래도 나는 모자란 것보다야 지나침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경우든 적절함을 찾아야 한다. 자꾸 대사, 대사 하다 보니 리퍼트 주한미국대사 이야기도 슬쩍 하고 싶어진다. 그에게 행해진 공격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까딱했으면 목숨마저 위험했을 중범죄가 틀림없다. 그러나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몇몇 현상들은 그 사건 만큼이나 괴이해 보인다. 사건 발발 후 정·관계 인사들의 발빠른 입장 발표와 누리꾼들의 댓글 사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응원메시지까진 좋았다. 물론 발언 의도에 외교역학적인 부분도 섞여 있겠지만, 피해자 본인인 루퍼트 대사가 “감사하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런데 개고기는? 기도회는? 여기까지도 애교로 봐드릴게. 그런데 정치권의 종북논란부터는 지나쳤다. 게다가 쾌유 기원 부채춤 공연(은 또 뭔가? 아이고, 창피하다. 강강술래는 왜 안하나? 쾌유 기원 널뛰기나 쥐불놀이는 어떨까? 심지어 아직도 석고대죄 운운하면서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이 있던데, 웃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나는 여전히 모자란 사과보다는 지나친 사과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쯤 되면 나라망신이다. 일국의 대사로서, 또 진심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리퍼트 대사가 보여준 의연함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에 대한 화답은 부채춤이나 석고대죄 단식이 아니라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차분하게 시스템을 점검하는 자세가 아닐까.
리퍼트 대사 대신 말해주고 싶다. 미국인인 그 분은 경상도가 고향인 나만큼 사투리를 못할 테니.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사진 AP 뉴시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 영화 <친구> 중에서 좋은 대사의 기준은 시대와 매체에 따라 다르다. 수십 년 전에는 명대사로 회자되었던 말이 지금 보면 촌스러운 경우도 있고, 반대로 요즘 명대사로 추앙하는 대사들을 수십 년 전에 썼다면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확률도 크다. 스크린 위의 명대사, 티브이 드라마에서의 명대사, 연극 무대 위에서의 명대사 또한 기준이 다르다. ‘요즘 영화’로 한정한다면 명대사의 제1기준은 ‘생활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할 법한, 완벽한 구어체의 말이어야 한다는 거다. 사극이야 시대 배경이 다르니 제외하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 “살아있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너나 잘하세요”, “살려는 드릴게” 등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기막힌 대사라며 흐뭇해 했던 경우는 대부분 우리 생활에 그대로 써도 무리가 없다. 이런 식의 생활어 대사들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했던 영화로 나는 두 편을 꼽는데, <연애의 목적>과 <친구>다. 생생한 영화 대사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분에게는 두 편을 꼭 추천해드린다. 그중에서도 <친구>는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명대사를 국민유행어로 만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느그 아부지 모하시노?”, “내가 니 시다바리가?”, “니 하와이 가라” 등 요즘도 종종 패러디되는 명대사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대사는 뭐니뭐니해도 요놈이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조직 내의 암투로 서로 칼을 겨눈 두 친구. 극 중 유오성의 사주로 똘마니가 장동건의 배를 마구 찌르는데 장동건이 단말마로 중얼거리는 말이다. 서울말인 문어체로 풀어보면 이쯤 되지 않을까? “이제 그만 찔러. 너무 많이 찔려서 나는 꼼짝없이 죽을 테니.”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나쳐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모두 안다. 그래도 나는 모자란 것보다야 지나침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경우든 적절함을 찾아야 한다. 자꾸 대사, 대사 하다 보니 리퍼트 주한미국대사 이야기도 슬쩍 하고 싶어진다. 그에게 행해진 공격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까딱했으면 목숨마저 위험했을 중범죄가 틀림없다. 그러나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몇몇 현상들은 그 사건 만큼이나 괴이해 보인다. 사건 발발 후 정·관계 인사들의 발빠른 입장 발표와 누리꾼들의 댓글 사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응원메시지까진 좋았다. 물론 발언 의도에 외교역학적인 부분도 섞여 있겠지만, 피해자 본인인 루퍼트 대사가 “감사하다”는 말까지 했으니.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이후, 일부 인사들이 그의 쾌유를 빌며 부채춤을 추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이후, 일부 인사들이 ‘석고대죄 단식’을 벌였다. 어떤 이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영화 <친구>의 대사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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