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익의 명대사 열전
내 이름은 호구. 강호구다.
- 드라마 <호구의 사랑> 중에서 살다보니 호구가 제목에 등장하는 드라마를 다 본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삼아 티비엔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호구의 사랑>(사진)은 주인공 이름이 호구다. 강호구. 거기에 걸쭉한 입담의 국가대표 수영 여신 도도희, 잘난 놈 변강철, 남자인 듯 여자 같은 밀당고수 강호경, 네 명의 호구남녀 캐릭터가 드라마를 이끌어간다.
우리에게 호구라는 표현이 익숙해진 것은 <파이란>이라는 영화 때문일 것이다. 배우 최민식이 맡았던 배역인 강재가 입버릇처럼 자신을 가리켜 ‘국가대표 호구’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었는데 이 대사가 꽤 회자되었다.
원래 호구는 바둑에서 유래된 말이다. 상대편 바둑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는 형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속에 바둑돌을 넣으면 영락없이 먹히고 말기 때문에 꼭 호랑이의 입 같다고 하여 호구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먹잇감이나 이용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호구와 관련한 최고의 명대사는 동료 PD에게 들은 말인데, 이렇다.
“고스톱을 치는데 누가 호구인지 모르겠잖아? 그럼 니가 호구인 거야.”
이렇듯, 자기가 호구인 줄 알면 진정한 호구가 아니다. 그런데 드라마 속 강호구는 특이하게도 스스로 호구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는 사랑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내가 미술학원 다닐 때 물감이 아까워서 조금씩 썼거든. 그랬더니 반도 못 쓰고 다 굳어버려서 못 쓰게 되었어. 물감이랑 마음이랑 똑같아. 아끼지 마. 그러다 굳어버리니까.”
살기가 팍팍하다보니 연애의 방식도 달라진다. 요즘은 남친 여친을 찾을 때도 스펙을 따지고 갑을 관계를 고민하고 스스로가 호구인지 아닌지를 걱정한다. 이런 세태에 강호구의 연애관은 참으로 안타깝게 보일 수도 있다.
강호구보다 170배쯤 호구인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다. 이 남자는 이미 딴 남자하고 결혼해서 사는 첫사랑을 위해 인생을 건다. 그녀가 사는 집 근처에 호화저택을 짓고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파티를 연다. 실상 그가 연모하는 대상은 그런 사랑을 받을 가치도 없는 허영심 가득한 여자인데도!
개츠비까지는 감히 범접할 수 없지만, 강호구의 명대사는 가슴에 새겨야 한다. 특히 사랑에 빠진 연인들, 가슴을 여는 것이 두려워 이리재고 저리재고 있는 썸남썸녀들은 더더욱.
마음이 굳어져버리기 전에 실컷 줘버리라는 호구의 연애론은 역설적으로 가장 똑똑하게 연애하는 방법이다. 사랑의 감정이란 받는 것보다 주는 과정에서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설령 이별하더라도 원 없이 마음을 준 쪽이 덜 아프다. 한 번쯤 진하게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 다 줄 필요는 없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선 다 줘야 한다는 것을.
나는 팔자 좋게 연애 따위에 감정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푸념하는 독자들도 있고, 필자는 희망고문에 시달려보지 않았나보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숱한 밤낮을 애태우고 태우며 보냈답니다.
나도 한때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을 낭비라고 생각하거나 고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 일은 자랑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왜 부끄러워하나?
연애하는 이들이여. 사랑할 때는 호구가 되어라. 당신 가슴에 있는 사랑의 물감, 혹자는 연애세포라 불리는 무엇이 말라버리기 전에.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 드라마 <호구의 사랑> 중에서 살다보니 호구가 제목에 등장하는 드라마를 다 본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삼아 티비엔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호구의 사랑>(사진)은 주인공 이름이 호구다. 강호구. 거기에 걸쭉한 입담의 국가대표 수영 여신 도도희, 잘난 놈 변강철, 남자인 듯 여자 같은 밀당고수 강호경, 네 명의 호구남녀 캐릭터가 드라마를 이끌어간다.
티비엔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호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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