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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붓을 노삼아 ‘역사에서 우주로’ 민중미술 오디세이 40년”

등록 2015-08-16 19:03수정 2015-08-17 09:09

‘화업 40년’ 개인전 연 이강용 화백
‘화업 40년’ 개인전 연 이강용 화백
[짬] ‘화업 40년’ 개인전 연 이강용 화백
화가는 물론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리기 위해서 살아왔고 그리기 위해서 살고 있으며 그리기 위해 살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천재 화가’란 뜻이다.

‘고인돌과 말라빠진 고구마.’(역사, 1985년작, 작은 사진) 화업 30년을 망라해놓은 이강용(58·큰 사진)씨의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의 첫인상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처음 본 그림이기도 하려니와 참 의아스런 소재의 조합이 아닌가. 뒤늦게 꺼내 본 전시 도록의 제목 <소멸의 시(詩)>도 낯선 표현이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 갤러리 5층 대형 공간에서 ‘광복 70돌 기념전’의 하나로 기획했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는 역사라는 이름의 소멸과 승부한다. 그의 작업은 소멸의 역사에서 불멸의 꿈을 되짚은 회화적 복기다.” 작가 겸 미술평론가 박인식씨의 추천사를 읽고 보니 어렴풋하나마 단서가 풀리는 듯도 하다.

고2 때 마산 다방 빌려 개인전 열어
“그리기 위해 태어난” 천재 화가
1980년대 상경 ‘민미련’ 열성 활동

탄압과 해체로 낙향 ‘토굴수행’ 8년
뒤늦게 환경대학원 진학 ‘고졸 석사’
고인돌·고구마·들꽃·미륵 ‘토종미학’

“그림을 언제부터 그렸느냐, 왜 그리기를 좋아했느냐 종종 묻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릴 때부터 혼자 그렸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는 늘 동네 화실에서 놀았어요. 운동을 하다 다쳐 고2 때 1년 휴학을 했는데 친구들 권유에 심심풀이 삼아 전시회를 했어요. 그때부터 스스로 ‘화가’가 되었다고 믿었던지 친구들에게 ‘네가 가라, 미대’라며 제법 초연하게 굴기도 했죠.”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껏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인 그는 1975년 시내 지로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고교생 화가’로 등단했다. ‘마른 명태’를 주제로 그렸는데 풍경·정물 등 수채화가 득세하던 주류에 나름 반기를 든 시도였다. 그때부터 82년 두번째 개인전을 열 때까지도 혼자 그렸다. “천상병 시인의 고향으로 이름난 마산합포구 진동리 외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이강용 화백의 작품.
이강용 화백의 작품.
그가 세상 속으로 뛰어든 것은 19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열기를 타고 민중미술운동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그 무렵 ‘노동운동의 기지’였던 마창공단 지역에서 걸개그림과 깃발 등을 제작하다 인연을 맺은 서울미술공동체에 합류한 그는 84년 서울로 상경해 첫 단체전에 참가했다. 그때 고 문영태 화백의 ‘심상석’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그는 85년 ‘시대정신 판화전’에 함께했다. 초기 연필화도 그렇고, 검은 밑바탕에 파스텔을 이용해 무수한 손길로 색을 입히는 특유의 화법도 그 영향이 크다.

같은 해 신군부의 대표적인 민중예술 탄압 사례로 꼽히는 ‘한국 미술 20대 힘전’에도 참여했다. 작품들이 철거당하고 항의하던 작가들이 구속되는 파란 중에 그는 경찰에 빼앗기지 않은 작품들을 모아 부산에 이어 마산에서 ‘해방 40년전’을 열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이 죽창을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소멸의 미학과 진검승부를 펼치던’ 시기였다.(박인식)

그러다 그는 90년대 초부터 8년 넘게 칩거에 들어간다. 88년 전후 현장 중심의 집단창작 미술운동을 표방하고 결성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에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던 그는 강한 투쟁성으로 홍성담·최열씨 등 주도 회원들이 구속되는 시련을 겪은 뒤 다시 낙향했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와 함께 민중미술운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온 민미련은 93년초 끝내 해체됐다. “진동리의 토굴 같은 작업실에서 수행하듯 그림만 그렸어요. 지금껏 마산에 있는 집은 가끔 아내와 아들과 더불어 밥 먹으러 가는 곳이죠. 뭐.”

그렇다고 그가 좌절하거나 현실도피를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91년 ‘한국의 야생화전’을 비롯해 해마다 마산에서 개인전을 꾸준히 열어 지금껏 26회의 개인전을 기록했다. 2011년부터는 ‘에꼴 28인전’ ‘인간시대’ 등 단체전을 통해 다시 서울 나들이도 시작했다. 2012년에는 마산 시내에 작업실 겸 갤러리를 열고 다양한 장르의 지역 예술인들과 소통과 융합을 도모하고 있기도 하다.

그해 12월에는 대학을 건너뛴 그의 이력에 ‘대학원 졸업 기념전’과 동문회 후원회장까지 추가됐다. 그것도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환경최고전문가과정이다. “사실 환경단체가 생기기 전부터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며 환경문제와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았어요. 오랫동안 그려온 야생화 작업 덕분에 보기 드문 고졸 석사가 됐죠.” 실제로 졸업전에서는 동북아식물연구소 현진오 박사와 함께 우리 토종꽃 그림과 사진을 나란히 소개해 그 수익금을 동문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민중미술이라는 배를 타고 그의 40년 미학 오디세이는 역사, 걸개그림, 들꽃, 안개, 고구마, 고인돌, 미륵, 들판, 호랑이, 우주에 이르는 항로를 따른다. 이 주제들은 한 줄의 실로 꿰어진다. 그 이름 토종이다. … 그는 민중미술의 사실주의적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멸되는 존재의 운명에서 태어나는 영혼의 불길을 놓치지 않은 낭만주의자였다.’

자신의 삶이나 작품에 대해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는 그는 박씨의 ‘낙인’에 기꺼이 동의했다. 전시는 20일까지 한 뒤 지하층으로 옮겨 2주간 연장될 예정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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