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도 있었는데 손을 못 써 죽는 경우. 미리 알지 못해 병을 키우는 경우. 이러한 서글픔이 사람 따라 달라지는 차별. 사람이 죽고 사는 일처럼 아쉽고 서러운 일도, 그래서 의견이 제각각인 일도 드물다. 완벽한 의료 체제나 정책이란 지구 위 어디에도 없는 것도 그래서인가 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희소병을 뇌성마비로 오진해서 13년간 누워만 있었던 소녀, 한 달 동안 검사하고도 희소병을 배앓이라 진단받은 신생아, 멀쩡한 전립선을 오진으로 떼어내 요실금 기저귀를 차고 다녀야만 하는 중년. 모두 지난 한 달간 뉴스다.
서울 강남역에는 적어도 얼굴에는 칼을 댈 줄 아는 의사들이 한 집 건너마다 천지지만, 전북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어린이는 지역 대학병원 포함 13곳의 병원에서 수술할 상황이 아니라며 기피해, 길을 헤매다 숨을 거둔다. 어디에서 누가 사고를 당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달라지는 격차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부조리.
그나마 뉴스가 될만한 사건만 지면을 통해 알려질 뿐, 수많은 의료사고와 오진은 아무리 선의의 명의들이 최선을 다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다.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피함을 피하려는 노력 역시 인간의 불가피한 생리다. 기술의 역사란 바로 이 도전의 역사다. 현실이 내는 신호를 디지털화하려는 IoT(사물인터넷)에서, 방대한 신호의 박동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인공지능까지. 인터넷이 가져온 복음, 바로 네트워크를 통한 협업은 그 최신사례다.
소녀의 오진을 발견한 것은 의사가 아닌 물리치료사였다. 성공하는 팀은 그 역할이 무엇이든 모두 기여를 한다. 의사든 약사든 조무사든 가족이든 누구든 환자의 성공을 위해서 각자 기여할 일이 있다. 하다못해 학교 과제도 공유문서를 열어 협업하는 시대지만, 환자라는 공유문서는 열리지 않고 있다. 의료 현장에 분업은 있어도 협업은 흔치 않다. 애초에 ‘네트워크를 통한’ 일 자체가 여의치 않다. 전북의 어린 중상자가 옮겨갈 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유선 전화로 일일이 해야 할 정도였다. 70년대도 아닌 2017년의 일이다.
인간은 때때로 대책 없이 낙관적이어서 내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은 남의 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유한한 우리는 100%의 확률로 분명히 어느 날 신체 어딘가에 이상이 발생하고 만다.
병·의원도 가깝고 의료보험도 충실하니 바로 병원에 가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포털에는 오늘도 질병의 증상을 호소하는 질의응답과 그 해법을 어떻게든 스스로 찾아보려는 각종 모임으로 가득하다. 가족 중에 전문의라도 있지 않은 이상 언제나 답답해지는 것이 환자다.
인터넷은 24시간 365일 언제나 어떠한 궁금증이라도 아쉬운 대로 상담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준다. 다만 당장 그 창구에 의료가 모자라니 대체의학이나 상업 정보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만약 의료가 IoT와 인공지능과 결합해 인터넷에 올라와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면? 이 상상의 구현이 이미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대는 이미 센서가 범람하는 시대. 스마트 디바이스에 최첨단 센서를 탑재해 내 몸의 ‘바이탈’을 갈무리할 수단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 전달이 육안의 시진(視診)과 촉진만 할 리는 당연히 없지만, 의사라는 인간도 결국은 한정된 입력을 경험으로 보완해 출력하는 정보처리 기계다. 눈앞에 없는 환자 진료에 한 사람의 의사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면 두 번째 의사가 소견을 준다면 그 실수는 줄어들 수 있고, 커뮤니티가 뒤를 봐준다면 그 확률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입력의 노이즈가 심하다면 “내방하세요”라든가, “일단 하루 더 지켜봅시다”와 같이 본격적 오프라인 진료를 위한 전 단계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 프로세스에는 생각하지 못한 이득도 있다. 환자의 생명 신호가 디지털화된다는 점이다. 환자로서도 병의 퇴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일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의 오감을 빌려, 증상을 텍스트화한다. “환부를 만져 보시겠어요? 딱딱한가요?” 등등 문진(問診) 또한 데이터화된다.
나의 생명신호를 자진해서 24시간 업로드할 수도 있다. 이 신호가 내 생명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면 말이다. 1~2년에 한 번의 건강검진으로 관찰하던 생명신호를 항시 관찰하는 일, 이 신호의 빅데이터는 신약 연구에도 쓰일 수 있다.
그렇게 확보한 자신의 정보, 하나의 디지털화된 증상에 대해 여러 세컨드 오피니언(이차소견)을 받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를 개방해 오픈소스 참가 형식으로 증상에 대한 다양한 진단을 모을 수도 있다.
다소간의 세월이 흘러 데이터가 쌓인 다음에는 커뮤니티 대신 뒤를 봐줄 인공지능이 생겨날 수 있다. 어차피 지금도 각종 ‘실장님’이 원장님 전후로 상담을 해주고 있는 바, 의사의 행태를 관찰해서, 의사의 분신으로 성장한 인공지능이 세컨드 오피니언 역할을 못할 리 없다. 알파고가 기보를 읽듯, 차트를 흡수하기 시작하는 날, 인공지능은 자신이 모자란 공부를 의사에게 수집시킬 수도 있다.
우버는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나쁘지 않은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제공해줬지만, 그 기한은 자율주행의 미래가 찾아오기 전날까지만이다. 마찬가지로 환자 진단의 일손이란 운전처럼 그 필요한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과도기의 직능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넘겨 준 환자에 집도하는 것이 인간 의사가 집중해야 할 본연의 역할일 수도 있다. 아직 그 손재주가 인간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을테니까.
하지만 로봇 공학을 우습게 볼 일도 아니다. 공상과학(SF)영화에서처럼 캡슐에 벌거벗고 들어가면 클라우드에 연결된 인공지능 의사가 나를 치료하는 미래,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기어코 인간은 만들어내고 말 터라는 것쯤,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월정액을 받는 그 시스템은 피가 튀어 번잡하고 위험한 수술이나 처치를 피하려고 미리미리 병을 막으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의료는 병이 나야 시작되고 산업이 가동된다. 하지만 앞으로의 의료는 병이 나지 않아야 모두에게 보상이 돌아가는 쪽으로 설계될 수도 있다.
미래는 이미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원격의료에서 개인정보까지 각자의 사연을 지닌 규제가 그 미래를 잠시나마 붙잡아두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미래는 꽤 단단히 붙잡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 정부는 관련 규제를 해소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며, 오히려 비급여 축소로 의료계가 재량을 발휘할 동기부여를 위축시키려 한다. 그런데 의료계의 재량이라는 것 또한 비급여 항목을 통한 수익보충이었을 뿐, 원격의료조차 집단 반대해 온 상황이니 모두의 관심과 명분은 오늘의 의료에만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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