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밍은 꿈을 꾸게 한다. 코드가 생각대로 실행되었을 때 호르몬이 솟구친다. 코드의 힘으로 현실의 부조리도 불합리도 모두 쓸어 버릴 것 같은 쾌감. 망상이라 해도 좋다. 혁신은 그 전날까지는 몽상이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이상(異相·理想)세계가 그러다가 정말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21세기는 이처럼 이상세계를 실제로 만든 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구글이 정보의 이상세계를, 아마존은 유통의 이상세계를 건설한다. 그 사이 페이스북은 소통의 이상세계를 만들었다. 중국식 이상세계를 건설한 텐센트의 시총은 삼성전자도, 아니 페이스북마저 제쳐버렸다. 현실의 제약 조건과 사정 때문에 할 수 없던 일들이 그 이상세계 안에서는 손끝만 까딱이니 끝나버린다.
하지만 이상세계에도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이상세계도 현실세계의 돈으로 만든 것. 금융위기를 일으킨 제도권 금융, 이를 수습하려 벌인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등을 보며 화폐조차도 누군가 손바닥 위의 허상이라 느끼게 된다. 아무리 이상세계가 그럴듯해도 현실의 돈 위에 쌓은 이상, 핀테크 등 금융 혁신모델조차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이상세계를 꿈꿨던 기업들도 어느새 거대해져 현실과 영합한다. 선의의 플랫폼도 사람이 주인인 이상 언제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신 세상에 흩어진 수많은 풀뿌리 참여자의 힘으로 중앙은행에도 대기업 플랫폼에도 속박되지 않는 이상세계의 가치 기반을 만들 수 있다는 선언. 10여 년 전 블록체인 비트코인은 그렇게 선포된다. 분산하여 존재하지만 동시에 체인처럼 엮인 결속의 커뮤니티.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는 이처럼 국가로부터도 기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극단적 이상세계를 꿈꿨다.
가상화폐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70년대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화폐 발행의 민간 자유화를 주장한 이래, 가상화폐 아이디어는 닷컴버블 때도 한번 훑어갔다. 이골드(e-Gold), 디지캐시(Digicash) 등은 모두 망했는데 원인은 민간 주체에 대한 불신이 악순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실제 그만큼의 금을 확보하여 태환 수단으로 보관하겠다고 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실제로 중앙은행놀이에 빠져 화폐를 마구 발행하는 인플레이션 착취를 하는 곳도 있었다. 발행회사가 망해버리면 화폐도 함께 공중분해될 뿐이었다. 요즈음 가상화폐라는 말 대신 암호화폐라 써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 시절에 대한 거부감도 한몫한다.
이 암호화폐는 중앙은행을 어느 회사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대신한다. 국가라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동시에 민간조직의 폭주로부터도 보호하는 이상적 장치. 국경도 규제도 없는 커뮤니티를 블록체인을 통해 가상 공간 안에 만들겠다는 포부. ‘암호화폐’의 참신함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장치에 화폐 이외의 다른 제도까지 얹어서 진정한 이상세계를 건립하자는 것이 비트코인 이후 이더리움으로 이어지는 몽상의 회로다.
ICO(초기 가상화폐 코인 공개)니 스마트 컨트랙트이니 분산자율조직(DAO)이니 이상을 향한 몽상은 구체화된다. 현실을 사는 생활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엄청난 것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망상인지 비전인지 알아내는 방법은 범인(凡人)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주어진 현실을 의심하는 이, 순응하지 않는 이들은 프로그래밍을 계속할 것이고, 이 몽상가를 만나 수상하고 위험스러운 길로 걸어가게 되어버리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세상의 진보는 이런 소수의 첫걸음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질 이 극단적 이상세계와 현실과의 관계였다. 암호화폐는 현재 공개되어 추적되고 있는 종류만 1500종이고, 지금도 수시로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다. 1500가지의 몽상이 초창기 웹사이트가 만들어지듯 피어나고 있다. 정보의 인터넷은 그 이상세계로 넘어가는 현관문(포털)을 만들었고, 흥했다. 비슷한 현관문을 이 가치 기반의 이상세계로도 뚫어놓자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된다. 바로 거래소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처럼 이곳은, 그곳을 향한 관문이 아닌 거래소였다. 은행에서부터 증권거래소 역할까지 자유롭게 겸업하는 민간의 무법 공간. 과연 이상세계를 향한 몽상에 찬동해 코인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지금 암호화폐를 구입하는 이유는 단 하나. 원화로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돈을 벌 것이라 믿기 때문에 산 것뿐이다. 이상을 파는 듯하나 실은 현실의 현금으로 주고받는 갬블 같은 일확천금, 그 짜릿한 손맛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이 무법공간 안에서는 주식이나 옵션에서처럼 룰도 심판도 없다.
적잖이 당황스러워진 것은 이쪽 현실의 제도와 권력이다. 자신을 대체하겠다는 저 세계의 주장도 우선 당황스럽지만, 그 세계가 아닌 엄연히 이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만으로도 자금세탁에서 투자사기 소비자보호까지 현안 투성이다. 저쪽 세계를 애교로 봐주고 암호통화를 상품으로 취급하고 싶어도, 암호통화의 가격은 시장가격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대국의 입장이 되어 가고 있다. 유통량에 비해 초기참여자의 소지량이 과할 수밖에 없기에 얼마든지 자전거래 등 여러 계좌를 거쳐서 사고팔면서 가격을 만들어갈 수 있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제도로 따라잡기에 이미 벅차다.
지금도 현실의 이면에서는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국을 꿈꾸는 몽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의 존재만 나열한 팸플릿을 만들고 그 수수료를 챙기는 거래소. 여기에는 이상을 향한 몽상가 대신 현실의 한탕을 꿈꾸는 이들이 모인다. 한국 거래소에서의 가격이 더 비싼 ‘김치 프리미엄’을 이용, 비트코인을 한국에서 팔고 금괴 68kg를 사간 일본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상세계가 현실을 위한 아비트라지(arbitrage·차익거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2011년에 종적을 감춘 사토시가 돌아온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지만, 참다못한 이더리움의 창시자는 요즈음 풍조에 대해 한마디 했다.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지도 못하면서 돈을 긁어모으는 현상을 규탄하며, 이대로 간다면 자신은 영원히 이 판을 떠나버리겠다고 협박 같은 푸념을 남긴 것이다.
거래소 천국 일본에서는 4년 전 마운트곡스 사건에 이어 엊그제 코인체크 사건까지 수천억원대의 대형 코인 분실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페이스북은 금융사기 등의 우려로 암호화폐 광고를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거래소라는 관문이 시민 안전의 명분하에 현실 속 권력에 의해 강제폐쇄되어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요즈음이다.
다행인 것은 관문이 닫혀도 그 안의 이상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만들려는 이상세계라서다. 근대의 경제라는 것도 인류의 역사상 작은 점에 불과한 것.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현실의 소동을 뒤로 하고, 내일의 이상세계를 몽상가들은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처럼 잔혹한 이쪽의 현실을 피해 저쪽 이상세계에 챙긴 돈의 도움을 받는 이들도 실제로 생겨나고 있다.
다만 거래소에 목돈을 넣고 시세에 초조해 하는 일은 세상을 바꿀 몽상가들의 이념도 실천도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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