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와 영국 파운드화. AFP 연합뉴스
달러화 강세로 위안화와 엔화 가치가 나란히 떨어지면서 아시아 경제가 과거 1997년 외환위기 수준의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각국이 저마다 환율 방어수단을 고민하고 있지만, 전 세계적인 정책 공조 없이는 이런 흐름을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
25일(현지시각)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의 가치 하락이 아시아 시장에 과거 외환위기 수준의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매파적인 통화긴축을 계속하면서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중국과 일본은 완화 정책을 고수하며 이들 통화의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중국은 경기부양을 위해 통화완화 정책을 유지 중이고, 일본도 ‘아베노믹스’라 불려온 완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에 따라 중국 위안화는 심리적인 마지노선으로 꼽히는 1달러당 7위안 선이 무너졌고, 일본 엔화 역시 지난주 장중 한때 1달러당 145엔을 돌파했다. 비쉬누 바라탄 미즈호은행 싱가포르의 경제·전략 담당자는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의 압박을 향하고 있다”며 “손실이 깊어지면 다음 단계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화와 엔화가 흔들리면, 아시아 시장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게 된다. 중국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고, 일본 엔화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가장 많이 거래되는 통화다. 일본 엔화와 모건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MSCI) 신흥국 통화 사이의 상관관계 지수는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안화와 엔화의 가치가 동시에 떨어지면, 아시아 금융시장에서의 급격한 자본 유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싱가포르 디비에스(DBS)그룹의 타이무르 바이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수출국인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금리보다 환율이 더 큰 위협”이라며 “부차적인 손해가 없더라도 1997년이나 1998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환율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짐 오닐도 ‘1달러당 150엔’선이 뚫릴 경우, 1997년 금융위기 수준의 혼란을 부를 수 있다고 예측했다. 특히 한국 원화를 필리핀 페소화, 태국 바트화와 함께 가장 취약한 통화의 하나로 꼽았다.
22일(현지시각) 일본 외환거래 업체 가이타메닷컴 딜링룸에 엔화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엔화 환율이 1달러당 145엔선을 돌파하면서 일본 외환당국은 엔화를 사고 달러를 파는 개입을 진행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보다 못한 일본은행은 22일 24년 만에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고 달러를 파는 실개입을 진행했다. 중국 인민은행도 26일 외환 선물환에 대한 외환위험준비금 비율을 0%에서 20%로 상향 조정했다. 위안화 선물을 팔 때 발생하는 비용 부담을 높여 위안화 매도를 막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킹달러’의 여파가 특정 국가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만큼 전 세계적인 정책 공조가 아닌 ‘각개전투’ 식의 개입은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엔화는 22일 외환당국의 개입으로 1달러당 142엔 선에서 마감했지만 다음 거래일부터는 다시 평가절하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월스트리트 저널>은 “전례 없는 통화 환경이 기존의 이론을 시험할 것”이라며 “일본의 엔화시장 개입이 (각국 통화개입의) 시작이라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고 전했다.
하지만, 전 세계적 정책 공조의 가능성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 <블룸버그>는 22일 “현재 환율시장은 1980년대를 떠오르게 하지만 해결책은 그때와 같을 것 같지 않다”고 전했다. 1980년대 미국이 높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고강도 긴축에 나서면서 달러화 가치가 치솟자 주요 경제대국들은 1985년 달러화 가치를 낮추고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올리는 ‘플라자 합의’에 도달했다. 헤지펀드 케이투(K2) 자산운용의 조사책임자인 조지 부부라스는 “지금 세계는 1980년대보다 훨씬 더 분열돼 있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달러 약세를 위한 세계적인 협동 가능성은 영(0)에 가깝다”고 말했다.
조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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