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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시간은 우리 편”…전쟁 끄는 러시아, 믿는 구석은 ‘에너지’

등록 2022-07-14 19:04수정 2022-07-15 14:40

러시아, 독일에 가스 공급 중단…장기화 우려
러시아, 겨울 대비 유럽의 가스 비축 봉쇄 나서
에너지 전쟁에서 러시아 역공이 현재는 우세
서방의 혁신 기회 vs 중·러의 유라시아 경제블록
지난 24일 브릭스 경제포럼에 화상회의를 통해 참석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뉴스
지난 24일 브릭스 경제포럼에 화상회의를 통해 참석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승패의 무대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서방과 러시아의 에너지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은 13일(현지시각) 자국과 독일을 연결하는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1에 쓰이는 가스터빈 공급 문제를 들며 가스관의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지멘스는 정기 점검을 위해 가스터빈을 캐나다로 보냈는데, 캐나다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처에 따라 터빈의 반환을 거부했다가 지난 주말 이 터빈을 예외적으로 반환하겠다고 밝혔다.

가스프롬은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성명에서 “이런 상황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설인 포르토바야 가스압축시설의 안정적인 운영과 관련한 상황 전개에 대해 객관적인 결론을 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11일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 운영을 일시 중단하며 오는 21일까지 예정된 연례 보수 작업을 이유로 들었으나, 유럽에서는 가스 공급이 재개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가스프롬의 13일 성명으로 유럽의 불안은 더 커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로부터 가스 공급이 중단되거나 축소된 유럽 나라는 12개국에 이른다.

지난해 러시아 대외 수입을 살펴보면 60%가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수출에서 나왔다. 지난 4월까지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10억유로(1조3137억원)를 지원했으나, 러시아에 에너지 수입 대금으로 350억유로(45조9826억원)를 지급했다. 서방은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 자금을 제공하는 셈이다.

독일 북부 루브민에 있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 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북부 루브민에 있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 로이터 연합뉴스

서방은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후해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제재를 단행해왔다. 지난 2월 22일 독일은 러시아와 자국을 연결하는 새 가스관 사업인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 중단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엔 유럽연합(EU)이 2030년 전까지 러시아 에너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올해 말까지 러시아 가스 수입을 3분의 2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금지했다.

러시아는 에너지 무기화로 역공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3월23일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참가한 “비우호적인 국가”들은 가스 수입 대금을 루블화로 지급하라는 조처를 내렸다. 러시아는 4월26일 루블화 지불을 거절한 불가리아와 폴란드에 대해 가스 공급을 중단하며 본격적인 에너지 전쟁에 나섰다. 6월 중순 들어서는 독일에 대한 가스 공급량을 급격히 줄이고, 이달에는 독일로 연결된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을 잠그는 조처까지 취했다.

아직까지는 러시아의 역공이 주효한 상황이다. 2020년 기준 가스 수입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한 유럽에서는 가스값이 지난해에 비해 5배가 폭등한데다,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를 완전히 대체할 만한 수입원도 못 찾고 있다.

산업도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천연가스가 화학, 비료, 철강업 등의 주요 원료이기 때문에 유럽의 관련 기업들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비료를 만드는 재료인 암모니아의 70%를 가스를 통해 만든다. 영국의 최대 비료회사인 ‘시에프 인더스티리스 홀딩스’는 지난달 공장 폐쇄를 발표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전했다.

카네기국제평화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가스 통제가 유럽에는 치명적이지만, 러시아가 치르는 대가는 상대적으로 작다고 분석했다. 가스는 석유에 비해 러시아 대외 수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2021년에 가스와 관련된 세수는 국가 예산의 10%였던 반면 석유는 30%가 넘었다.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 판매를 완전히 중단하면 손실은 400억달러가 날 것으로 추정된다. 가스 판매는 중단이 아니라 감축될 가능성이 더 높은데 이 경우에는 가스 가격 폭등으로 러시아가 벌어들이는 돈은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러시아가 가스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이유는 유럽 국가들이 겨울에 대비해 가스를 비축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라고 카네기연구소는 지적했다. 유럽에서 가스 수요가 가장 높을 때는 10월부터 3월까지로 매월 평균 2700억㎥를 소비한다. 현재 유럽연합의 가스 저장량은 1천억㎥이고, 200억㎥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4월에서 9월 사이에 가스 공급이 축소되면 유럽 국가들의 가스 저장량이 줄어들어서 겨울철 심각한 가스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러시아는 현재 유럽연합에 하루 1억5천만㎥를 공급한다. 1년 전에 견주면 3분의 1에 불과하다.

유럽은 노르웨이 가스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늘려서 부족분을 채워왔다. 미국의 액화천연가스 수출은 지난 6월8일 프리포트 액화천연가스 공장이 사고로 폐쇄돼 차질을 빚고 있다. 이 사태는 3개월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 수출량의 17%인 하루 6천만㎥가 줄었다. 미국은 올해 유럽에 150억㎥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어려워졌다. 최근에는 노르웨이 가스전 파업으로 인한 폐쇄도 겹치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서방은 중동의 카타르 등으로부터 대체 수입을 확보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독일과 영국은 지난 5월부터 카타르와 액화천연가스 수입 확대를 협상하고 있으나, 타결에는 몇달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주도로 러시아 석유가 상한제가 6월28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합의됐으나, 시행까지 얼마나 걸릴지 불확실하다. 러시아가 상한제에 맞서 석유 공급을 줄이면, 오히려 석유값이 폭등할 우려도 있다.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지난 11일 러시아산 경유를 저렴하게 수입하는 러시아와의 협상이 거의 타결됐다고 발표해, 대러 제재의 효과는 더욱 약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2009년과 2014년에 가스관 통행료나 가스 가격을 놓고 우크라이나와 주변 국가들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해 우크라이나의 무릎을 꿇게 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때는 서방과 간접적인 전쟁을 벌였다. 오일쇼크로 미국 등 서방의 산업은 제조업에서 지식산업으로 이행하는 혁신이 일어났으나, 소련은 고유가에 취해 국내 경제 혁신을 도외시하고 제3세계로 진출을 확대하다가 유가 하락 뒤 소련 해체로 이어졌다.

이번 에너지 전쟁으로 러시아가 중국과 손잡고 미국에 맞서는 유라시아 경제블록을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지 아니면 1970년대처럼 러시아가 화석연료의 포로가 될지는 진행 중이다.

정의길 신기섭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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