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9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시에서 열린 ‘여성 행진’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목을 조르는 여성을 그린 그림을 들고 있다. ‘여성 행진’은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 증진 등을 요구하는 집회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이었던 2017년 1월21일에 처음 열렸으며, 이후 해마다 열려왔다. 뉴욕/AFP 연합뉴스
2020년 미국 대선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진보·자유주의 진영에는 절반의 성공이자 실패이다. 민주적인 시민 가치를 폄훼하는 도널드 트럼프를 대선에서 패배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트럼프주의는 건재한 징후를 보였기 때문이다.
트럼프도 전례 없는 동원력을 보였고, 소수인종과 집단에서 트럼프 지지가 높아지고, 연방하원에선 민주당의 의석이 줄고, 주 의회에서도 공화당이 완승했다. 민주당 내에서 선거 결과를 놓고 즉각 진보파 대 온건중도파의 논쟁이 발화됐다.
온건중도파 의원들은 당내의 진보파들이 경찰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경찰 예산 중단’ 같은 급진적 의제를 내세워, 무당파층이나 온건중도 유권자들의 민주당 지지를 막았다고 비판했다. 반면, 진보파들은 경찰의 인종차별 폭력에 항의하는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민주당의 동원력을 높였고,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약 1만6000원) 운동 같은 진보파의 핵심 의제가 대중성을 얻었다고 반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가 11월 8일(현지 시각) 미국 네바다주 노스라스베이거스에서 대선 결과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해 피켓을 들고 있다. 노스라스베이거스/AP 연합뉴스
‘경찰예산 중단’ 운동과 15달러 최저임금 운동의 허실
양쪽 주장 모두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지난 5월 흑인 용의자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 체포과정에서 목이 졸려 숨지면서 전국적으로 번진 반인종차별 시위의 발원지인 미니애폴리스의 선거 결과는 온건중도파들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플로이드가 숨진 미니애폴리스의 도심인 연방하원 5선거구는 민주당의 대표적인 진보파 의원인 일한 오마르의 지역구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후보는 이곳에서 80%를 득표했지만, 오마르는 64.3%를 얻었다.
오마르의 지역구에서는 플로이드 사망 이후 폭력이 수반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오마르는 미니애폴리스경찰국 해체와 그 예산의 전용을 주장했다. 오마르가 바이든에 비해 득표력이 떨어진 것이 반인종차별시위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오마르 지역구에서 교외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에디나에서는 바이든 67.9%, 오마르 39.6%로 격차가 벌어졌고, 전반적인 득표력도 떨어졌다.
아비가일 스팬버거 민주당 하원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교외 지역에서는 경찰예산 중단 같은 구호와 시위를 공화당이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져서 낙선 위기까지 몰렸다고 하소연했다. 제임스 클라이번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는 풀뿌리 차원의 선거일수록 ‘경찰예산 중단’ 구호가 치명적이었다며, 민주당이 연방하원에서 10석이나 잃은 것도 그 영향이 크다고 주장했다. 당내 온건중도파들은 10석을 더 얻을 수 있는 선거에서 10석이나 줄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진보파가 앞세운 의제 중 하나인 시간당 15달러 최저임금 운동을 보자. 접전의 예상과는 달리 트럼프가 쉽게 이긴 플로리다에서 15달러 임금안은 60.8%로 통과됐다. 플로리다에서 트럼프는 51.2%, 바이든은 47.8%를 얻은 것을 감안하면, 초당파적 지지를 얻은 것이다.
임금을 더 많이 주는 의제가 당연히 인기가 있지 않겠냐는 반론도 있지만, 최저임금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주는 영향이 커서 논란이 큰 사안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은 큰 반발과 논란을 불렀다.
지금까지 15달러 최저임금을 통과시킨 주는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일리노이,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뉴저지, 뉴욕으로 민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 공화당이 줄곧 우위를 보여온 플로리다에서 15달러 임금 통과는 전국적인 시행을 알리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체성 정치는 민주당 보다 공화당에 유리’…트럼프주의 탄생에 기여
트럼프가 2016년에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의 진보·자유주의 세력 내에서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됐던 것이 ‘정체성 정치’였다. 진보 진영과 민주당이 인종·젠더 등의 정체성에 기대어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는 것이 트럼프를 불렀다는 것이다.
인종과 젠더, 종교 등에 기반한 소수인종과 집단들의 이해 관철에 진보·자유주의 진영과 민주당이 주력하다 보니, 미국 사회에서 주류라고 생각하는 백인 중하류층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불렀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에서 갈수록 뒤쳐지는 내륙 비도시 및 전통공업 쇠락지역의 저학력 백인 중하류층은 실제로 잊혀지거나, 경제사회적 지위가 하락했다. 트럼프는 이들을 대상으로 역으로 더 큰 ‘정체성 정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다수 집단인 백인을 대상으로 ‘정체성 정치’를 벌인 것이 트럼프주의의 요체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대의 마이크 테슬러와 린 버브렉 교수는 <정체성 위기: 2016년 대선과 미국이라는 의미에 대한 전투>에서 이런 정체성 정치를 지적했다. 그들은 트럼프가 모든 정치 및 선거 룰을 무시하고 깬 것 같지만, 오히려 가장 충실했다고 지적했다. 즉, 트럼프는 결국 선거 승리의 요체인 다수 집단을 묶어냈다는 것이다. 민주당 온건중도파의 경찰예산 중단’ 구호 비판도 이런 정체성 정치 논란에서 나온다.
컬럼비아대의 셰리 버먼 정치학 교수는 <가디언> 기고에서 “정치가 명확히 구분된 정체성 집단 사이의 싸움이 되는한, 집단 정체성에 대한 호소나 위협은 민주당 보다는 공화당에게 더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의 백악관 전략고문인 스티브 배넌의 악명높은 말을 소개했다. 배넌은 자신에게 좌파의 “인종 정체성 정치는 충분하지 않다”며 “그들이 정체성 정치를 더 길게 얘기할 수록 좋고, 그들이 매일 인종과 정체성에 대해 말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9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차에 타고 마러라고리조트를 떠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팜비치/로이터 연합뉴스
고학력 엘리트, 브라만 좌파, 애니웨어…대중 겨냥한 공통 이념·정책에 초점 안맞춰
약자와 소수자를 이익과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정체성의 정치가 진보 세력의 발목을 잡는다는 논란의 뿌리는 깊다. 이는 진보 세력의 거대담론 실종과 관련이 있다. 2차대전 뒤 전후부흥 및 복지확대 등 소득재분재 정책에 기초한 자본주의 황금기가 1960년대를 끝으로 종료되면서, 진보 진영은 새로운 이념과 철학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60년대말 서구의 68혁명 뒤 진보 세력들은 대중 전반을 묶으면서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하는 이념과 운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소수집단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실현했다고 자위했다.
80년대 이후 보수세력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으로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데도, 진보 세력은 별다른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력하게 편승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상황에서 유리한 계층들이 미국 민주당 등 서방의 자유주의 정당의 주축이 됐다. 진보의 고학력 엘리트화라는 소리가 나오는 지점이다.
<21세기의 자본>으로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석학으로 떠오른 토마 피케티는 이를 놓고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브라만 좌파’라는 표현을 했다. 진보 세력이 인도 카스트의 사제 계급인 브라만처럼 됐다는 것이다. 반면, 보수는 돈만 밝히는 ‘상인 우파’가 됐다고 비유했다. 영국 언론인이자 정치평론가인 데이비드 굿하트는 ‘애니웨어, 섬웨어’ 개념으로 설명했다. 세계화 시대에서 어디에서든지 경쟁력을 보일 수 있는 이들은 ‘애니웨어’(어디든지) 그 반대로 전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사하는 이들을 ‘섬웨어’(어느 곳)라고 지칭했다. 그는 애니웨어들이 미국 민주당 등 서방의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 세력의 근간이 됐고, 섬웨어들이 보수정당이나 트럼프주의 등 극우포퓰리즘에 지지층이 됐다고 분석했다. 늘어나는 섬웨어들의 경제 사회적 지위 하락과 그들의 불만과 분노를 트럼프같은 이들이 흡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 AFP 연합뉴스
차이 강조하는 문화 좌파적 접근 지양하고, 사회경제 정책에선 진보적으로
‘경찰예산 중단’ 운동이 민주당 의석을 줄였는지 혹은 동원력을 높였는지는 불명확하나, 일부 유권자들을 불편하게 한 것은 분명하다. 반면, 최저임금 15달러 의제는 다수 대중들에게 훨씬 더 소구력을 보였다.
이는 70년대 이후 민주당이 주력해온 정체성 정치가 한계에 오고, 대중 전반의 공통적 이해를 반영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두가지 처방이 동시에 나와야 함을 말한다.
민주당 내에서는 엘리자베스 워런과 버니 샌더스 등 진보파가 주장하는 부유세, 전국민의료보험 등 경제적 정책들을 트럼프주의 등의 사조를 바꾸려는 신호등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이 나온다. 이는 당내의 온건중도파들이 경제사회 정책에서는 진보적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진보파들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에 주안점을 두는 문화 좌파적 접근을 지양해야 하는 처방도 나와야 한다. 즉, 차이에 대한 강조는 운동의 초기에는 필요하고 유리하나, 시간이 갈수록 그 효력보다는 반작용이 커진다는 것이 정체성 정치 논란의 핵심이다.
트럼프는 거울이지, 비정상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이는 트럼프주의가 정책이나 이념이라기 보다는 대중들의 분노와 불만을 드러내는 징후이자 결과라는 지적과 상통한다. 대중들의 분노와 불만은 결국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에서 나온다.
미국의 연방 최저임금의 구매력은 60년대 이후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60년대 연방 최저임금은 중간임금의 절반이었는데, 현재는 3분의 1에 불과하다. 현재 연방최저임금은 7.25달러로, 플로리다주가 통과시킨 15달러의 절반에 못미친다. 최저임금 자체가 구매력이 낮아진데다, 그마저도 지역별로는 큰 불균형을 보이는 현실이다.
풀뿌리운동을 해온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사라 이너모레이토 펜실베이니아 주의원은 <시엔엔>(CNN)에 민주당을 계속 괴롭히는 도전들인 인종, 계급, 경제에 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갈등을 화해시키지 못하면 트럼프주의를 물리칠 수 없다고 강조했다. 60년대 민주당의 기반이던 백인 노동계급들이 왜 공화당으로 전향했는가를 자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굿하트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찬성한 ‘섬웨어’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면, 결코 인종주의 등 극우적이거나 반동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애니웨어들이 그들을 방치하고 무시했을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등 전 세계에서 섬웨어들이 보수화, 혹은 극우화하고 있다. 트럼프주의 등 극우 포퓰리즘의 전 세계적인 바람은 진보·자유주의 세력들이 대중 전반을 향한 이념과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