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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경마, 살생하는 도박

등록 2022-03-02 16:34수정 2022-03-03 02:31

경마장을 달리는 경주마들. 경마는 매주 금~일요일에 열리는데, 여기에 3500마리 안팎의 경주마가 동원된다. 해마다 절반 넘는 말들이 ‘주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은퇴를 한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경마장을 달리는 경주마들. 경마는 매주 금~일요일에 열리는데, 여기에 3500마리 안팎의 경주마가 동원된다. 해마다 절반 넘는 말들이 ‘주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은퇴를 한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편집국에서] 박현철 | 콘텐츠기획부장

“그걸 넘어지냐, 이 ○○야!”

경륜장 취재를 간 적이 있다. 넘어져 들것에 실려 가는 선수를 향해, ‘너 때문에 내 돈을 잃었다’며 퍼붓는 비난이었다. 선수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했다. 마치 경륜이 건전한 레저스포츠인 양 지면 한바닥을 채운 기사가 나갔다. 한 선배는 “한겨레에서 경륜 기사를 이렇게 크게 쓰긴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세상 어디에든, 심지어 범죄 현장에도 누군가의 애환은 있기 마련일 텐데. 순진했다.

15년도 더 지난 경륜장 경험이 떠오른 건 최근 한겨레S가 쓴 커버스토리 ‘경주마로 산다는 것’을 보고 나서다. “때려, 때려!” “버텨, 버티라고!” 흥분한 경마장 관중들이 소리치는 동안 경주마로 끌려온 말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경마는 한국마사회가 주관한다. 서울과 부산·경남, 제주 세 경마공원에서 매주 금·토·일요일 열린다. 여기에 동원되는 말이 3500마리 안팎인데, 해마다 절반 넘는 말들이 은퇴를 한다. 말들이 은퇴하는 이유는 ‘주행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달리는 게 천성인 말들을 모아 달리게 했는데, 왜 주행 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경주마 ‘황야질주’는 지난해 여름 경주마로 팔려 온 뒤 딱 두번 경주를 하고 지난 1월 3살 나이에 죽었다. 평균 25~30년을 사는 말의 나이 3살은 사람으로 치면 10대 중후반이다. 죽기 하루 전 황야질주는 경주마 자격이 취소됐는데, ‘천지굴건염’이 생긴 게 이유였다. 다리 힘줄이 끊어지거나 늘어나 염증이 생기는 질병이다. 무리하게 달려 생긴 병이다. “죽음의 직접 원인이 되는 질병이 아니지만 많은 경주마가 도태되는 원인”인 탓에 황야질주는 경주마 자격을 잃었고, 폐사했다. 폐사. 죽게 내버려뒀거나 안락사시켰다는 뜻이다.

해마다 절반 넘는 경주마들이 은퇴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때리고” “버틸” 정도로 다그치면 제아무리 달리는 천성을 지닌 말이라도 버틸 수가 없다. 마주는 경주 능력이 떨어져 상금도 벌어오지 못하는 말을 가만두지 않는다. 마리당 한달 100만원 넘는 관리비가 들어간다.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퇴역 경주마들은 갈 곳이 없다. 반려동물로 들일 수도 없다. 승마장으로 팔려와 하루 한두번 사람을 태우는 삶을 살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 안락사하거나 도축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말산업 정보포털엔 퇴역한 경주마들의 용도가 표시돼 있다. 2021년 은퇴한 서러브레드(경마를 위해 개량된 종으로, 전체 경주마의 70%를 차지한다)종은 1537마리인데, 이 중 62%(958마리)가 ‘용도미정’이다. 식용으로 도축되거나 퇴역 후 폐사, 안락사한 경우 모두 용도미정에 포함된다. 이 비중은 해마다 늘고 있다. 오죽하면 제주도가 퇴역 경주마를 ‘활용’해 반려동물 사료 공장을 세우려 했을까.

다행히 ‘폐사’를 피했던 퇴역 경주마 ‘까미’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잔혹하게 죽어갔다. 지난해 11월 <한국방송>(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제작진이 낙마 장면을 찍는다며 발목에 밧줄을 묶어 쓰러뜨린 까미는 경주마 ‘마리아주’였다. 2017년에 태어난 마리아주는 2019년 11월 경주마로 등록된 뒤 세번 경기에 나갔다. 2021년 8월1일 마지막 경주에서 마리아주에게 폐출혈이 발생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다 혈압, 심박수가 높아져 폐포의 모세혈관에서 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사흘 뒤 마리아주는 은퇴했고, 석달 뒤 4살의 나이에 죽었다.

경륜, 경마, 경정, 카지노, 복권. 모두 나라가 허락한 도박이다. 도박은 징역이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지만, 허락받은 도박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 합법 도박이 존재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일자리이기도 하니까. 도박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거나 위협하진 않으니까. 관리만 잘한다면.

경마는 다르다. 한국마사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경주마 산업은 “지나치게 많은 말들을 번식시켜 ‘잉여’ 말들을 생산하고 은퇴시킨 뒤에는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는다.”(필립 샤인 페타 연구원) 생명을 책임지지 않는 건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살생하는 도박을 이대로 둘 순 없다.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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