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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태호의 저널리즘책무실] 이태원 참사 명단공개, 어떻게 보십니까?

등록 2022-11-16 20:12수정 2022-11-17 00:28

유족 동의도 없이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이 이런 위험성을 모두 상쇄할 만큼 긴박한 공적 가치가 있는지 전혀 동의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안의 출발점은 ‘일방적 명단 공개’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 회피’에서부터 봐야 할 것 같다. 일방적 명단 공개를 비판하나, 여당 관계자가 ‘인권의 화신’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는 게 무척 힘이 든다.
지난달 31일 정부가 서울광장에 설치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분향하고 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라고 쓰여져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정부가 서울광장에 설치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시민들이 분향하고 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라고 쓰여져 있다. 연합뉴스

<시민언론 민들레>와 <더탐사>가 공동으로 지난 14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유족 동의는 없었다.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언론노조, 민주언론시민연합, 민변, 언론인권센터 등 시민·언론·노동단체들이 일제히 반대 뜻을 밝혔고, 정의당도 비판했고, 더불어민주당도 ‘유족 동의 없는 명단 공개’에는 선을 그었다. <한겨레> <경향신문> 등 진보적 매체도 비판적이었다. 한마디로, 공론장에서 어느 정도 승부가 결정난 것처럼 보인다. 높아진 ‘인권 의식’과 ‘피해자 우선주의’가 이젠 상식이기 때문이다. 또 두 매체가 친민주당 성향이 강해 명단 공개가 정파적이라는 의심을 샀다. ‘희생자 명단’을 도구화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민들레>는 명단 공개 이유로 “희생자들을 익명의 그늘 속에 계속 묻히게 함으로써 파장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잃어버린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참된 애도의 출발점이라고 봤다”고 했다. 예전에는 참사가 일어나면, 희생자 명단이 시시각각 발표됐다. 통신수단 미비로 실종·사망자 확인이 필수였고, 유족들의 거부반응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인권과 사생활 보호 의식이 높아져, 희생자 명단을 허락 없이 공개하는 경우가 잘 없다. 지난 9월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당시에도 실명이 공개되지 않은 보도가 많았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아파트 붕괴나 수학여행 참사 등 동일한 집단이 희생된 게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길에서 숨진 것이다. 따라서 희생자마다 각기 어떤 사정이 있을지 알 수 없다. ‘핼러윈’이라는 축제 성격으로 2차 가해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이 이런 위험성을 모두 상쇄할 만큼 긴박한 공적 가치가 있는지 전혀 동의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안의 출발점은 ‘일방적 명단 공개’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 회피’에서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참사가 터졌을 때, 윤석열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국가애도기간 선포였다. 지금까지 애도 기간이 선포된 적은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피격 사건’과 이번 ‘이태원 참사’ 이후였다. 사회 전반의 큰 슬픔 속에 애도 기간 선포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건 곤란했다. 이 기간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많은 민관 문화행사들이 일괄 취소됐다. 각 주체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을, 정부가 지침으로 일원화한 것이다. 전체주의적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애도 기간’을 책임 회피 수단으로 악용했다. 정부는 발 빠르게 합동분향소를 만들었다. 위패와 영정 사진이 없는 분향소라는 지적이 나왔다. 물론 유족 동의 없는 위패, 영정 설치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유족에게 동의를 묻는 이 작업을 누가 해야 하나. 분향소를 설치한 정부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민들레>의 일방적 명단 공개를 비판하면서도, 정부나 여당 관계자가 마치 ‘인권의 화신’이나 된 양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는 게 무척 힘들다.

아울러 이번 사안이 주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참사가 벌어지더라도, 정부는 ‘유족 동의 없는 명단 공개는 안 된다’며 유족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낼 기회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언론의 취재도 제어될 수 있다. 참사 초기 일각에서 ‘유족의 사연을 취재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초년 기자 시절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유족 사연 취재’가 때로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 많이 겪었다. ‘희생자가 누군지 알아야만 애도할 수 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 파악이 더 본질적’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사연 기사’는 취재하는 것도, 읽는 것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참사 이후,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유족들을 취재해 희생자 실명은 물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전의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기사에 실었다. 9·11이나 총기 난사 등 참사가 일어날 때, 미국 언론의 흔한 보도 행태다. 미 언론사 뉴스룸은 이를 ‘피플링’(peopling)이라 한다. 피플을 동사화한 것으로, 우리말로 표현하면 ‘사람 냄새 나는 기사’라 하겠다. 그런 기사를 보고 희생자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그럴수록 유족을 위로하게 되고, 가해자 또는 책임자에 대한 울분을 더 높이게 된다. 제대로 된 ‘사연 취재’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고양해야 할 공적 가치이자 연대가 될 수 있다.

지난 11월3일 &lt;워싱턴포스트&gt;의 ‘이태원 참사’ 관련 보도. 희생자들의 유족을 취재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실명과 생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지난 11월3일 <워싱턴포스트>의 ‘이태원 참사’ 관련 보도. 희생자들의 유족을 취재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실명과 생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민들레>의 ‘명단 공개’ 여파로 혹시 정부와 언론 모두 희생자를 제대로 기억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민들레>는 명단 공개 뒤, 유족 요청이 들어오면 이름을 삭제하고 있다. 이미 10여명은 ○○○으로 표기됐다. 거꾸로 할 순 없었을까. 언론이 158명 희생자 유족을 모두 접촉하겠다고 선언하고, ○○○을 실명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나씩 해나갔다면.

권태호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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