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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부를

등록 2023-04-03 18:22수정 2023-04-04 02:37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린 지난 3월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위원장인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린 지난 3월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위원장인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저출생과 이미 태어난 사람들의 불행이라는 두 현상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성별임금격차처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우리가 주로 끝에서 선두를 달리는 여러 지표에는 자살률도 포함된다. 신생아 수가 한해 25만명 밑으로 떨어진 현재, 한해 동안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1만3천여명의 서사가 더욱 안타깝다. 특이한 점은, 인구집단별로 비교했을 때 남성 노인과 더불어 여성 20~30대 자살률이 오이시디 가입국 중 최고로 높다는 점이다. 최근 20년 동안 대부분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높아졌지만, 두배 이상 증가한 인구집단은 여성 20~30대가 유일했다. 2000년 20대 여성 사망 원인의 단 18.6%에 불과했던 고의적 자해, 즉 자살은 2021년엔 무려 62.7%로 높아졌다.

그렇다면 왜 삶의 절정기에 생을 포기하는 걸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그 피해자를 극단적 선택으로 이끌 수 있다. 덴마크 출신 사회학자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은 <끝나지 않은 혁명>에서 불완전한 성평등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다중균형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전통적 가족주의 균형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가사·양육의 평등한 분담이 특징인 성평등 균형이 한 사회에 공존할 때, 마치 두개의 태양이 있는 것처럼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해 저출생 같은 최적 이하의 결과를 가져온다.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 안정적인 핵가족은 20세기 중반에 잠깐 나타났던 역사적 유물이다. 북유럽의 경우 전업주부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결혼 중 절반이 이혼으로 끝나며 아동의 절반은 혼외 출산이다. 극단적인 가족주의가 가족을 더 빠르게 해체하는 지독한 역설 속에,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성평등 균형을 추구하는 소수자집단인 젊은 여성의 고통은 더 깊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 정치가와 관료 상당수는 20세기에 결혼해 전업주부의 헌신에 기대어 현재 지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출생을 걱정한다는 이들이 출산의 주체인 젊은 여성이 겪는 좌절과 불안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미 자녀를 가진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길 원한다. 이들의 직업은 매우 안정적이어서, 일자리 자체를 얻지 못하거나 근로기준법도 적용되지 않는 영세업체 직원이거나 노동자로 여겨지는 것조차도 어려운 위장된 자영업자인 다수 여성 노동자에게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지원 확대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도 노동시간은 늘리면서 말이다.

저출생은 너무 비싼 주택과 사교육비, 불안정한 일자리로 악화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복지국가가 전통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출산율의 일부 손실은 불가피하다. 성평등 균형이 지배적인 균형으로 퍼지도록, 모두가 노동자이자 돌봄자가 되는 방향으로 복지국가의 패러다임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출생의 덫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은 이런 식으로는 더는 살 수 없다는 젊은 여성들의 조용한 절규다. 이런 치명적인 경고를 무시한 채 현 정부처럼 성평등에 무관심을 넘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지루한 다중균형사회의 대치 속에 우리는 원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아이들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도, 소박한 부탁이 하나 있다. 군 복무를 아이를 낳지 못한 처벌쯤으로 간주하고, 증여는커녕 대출이자도 마련하기 어려운 서민 가족을 능멸하며, 여성 대상 적극적 조치에는 그렇게 반대하며 강조하던 능력주의 따위는 과감하게 내던져버리는 온갖 기괴한 대책으로 정신적 고통을 준 뒤, 결국 전혀 효과 없는 기존 정책의 잡탕 같은 저출생 대책을 또 수고스럽게 발표하는 것을 듣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다. 정부가 제발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았으면, 제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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