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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세사기로 보증금 다 날린 피해자에겐 재난지원금을 [아침햇발]

등록 2023-05-09 15:00수정 2023-05-10 02:39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1만인 서명운동 돌입 선포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등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1만인 서명운동 돌입 선포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등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정남구 | 논설위원

집을 빌려 쓰기 위해 집주인에게 일정액의 돈을 맡겨뒀다가 계약이 끝날 때 다시 찾아가는 임대차계약이 ‘전세’다. 우리나라엔 흔하지만,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제도다.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 박신영 책임연구원이 쓴 논문을 보면, 전세 제도는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해 3개 항구를 개항한 뒤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농촌 인구가 수도로 이동하면서 주택 수요가 급증할 때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선 서울과 수도권의 주택 953만채에 전세 세입자가 198만가구였다. 1995년 이후 보증부 월세가 늘어나면서 순전세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20%가 넘는다.

전세의 본격 확산은 수도권 집중이 심화하는 가운데, 정부가 기업대출에 전력하기 위해 가계대출을 억제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집 사는 사람은 일부를 전세로 내주고 보증금만큼 돈을 덜 들여 집을 살 수 있었다. 시세 차익을 노리는 사람도 전세보증금과 집값의 차액만 들여 집을 한채 더 살 수 있었다. 전세는 세입자가 보증금을 저축해 받을 수 있는 예금이자와 집주인이 보증금 대신 빚을 내 집을 샀을 때 대출이자 간 차이를 함께 나눠 갖는 ‘윈윈’ 거래였다.

그런데 전세 제도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됐음에도 세입자가 보증금을 떼이는 일이 많다는 건 심각한 일이다. 1998년 외환위기 뒤 집값과 전셋값이 급락했을 때 보증금을 떼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 뒤로는 ‘깡통전세’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는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찍이 볼 수 없던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아파트보다는 애초 깡통전세 위험이 컸던 빌라, 오피스텔, 다세대주택에서 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선순위 채권자가 있음에도 중개사의 설명만 듣고 문제없을 것이라 믿었거나, 신축 건물이란 이유로 전세보증금이 집값에 근접하거나 비싼 걸 모르고 계약한 세입자의 부주의와 무지를 탓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싼 수수료를 받으면서도 세입자가 보증금을 안전하게 돌려받을 수 있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중개사, 오히려 사기꾼을 도운 중개사와 감정평가사, 기획부동산 업체가 조직적으로 가담한 범죄를 막지 못한 정부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도 결코 말할 수 없다. 임대인 3명 명의의 사기 피해 주택이 3천채에 육박하는 인천 미추홀구의 경우, 임차보증금이 평균 1억원이 안 된다. 대부분의 세입자가 보증금이 전재산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임대차계약이 어디 경험을 쌓아 능숙해질 수 있는 일인가. 빈틈을 보인 세입자가 고스란히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정부와 여야가 전세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특별법을 논의하고 있다. 피해자에게 주택 우선매입권을 보장하고, 경락대금 저리 대출을 지원하고 취득세와 재산세를 감면하며, 우선매입권을 공공에 넘기는 경우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하게 해주는 것 등은 확정적이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보증금 채권을 한국자산관리공사 등이 선매입하느냐는 아직 논의 중인데, 공정가치 평가를 거쳐 매입하는 것이라면 피해자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선순위채권액이 커서 보증금 채권의 가치평가가 0인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선매입권을 공공이 사들이면서 피해액의 일정 비율을 재난지원금으로 주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전재산을 날리는 사기 범죄 피해는 생명·신체 범죄 피해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세입자들은 여전히 전세 쪽이 월세보다 실질 주거비가 덜 들고, 내집 마련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전세보증금을 저축해 이자소득세를 떼고 받는 돈으로 월세를 내기는 어렵다. 집주인들도 대출받아 보증금을 돌려준 뒤 월세를 받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못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세대출이 늘어나면서 전세가 은행에 일부 월세를 내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맞춰 월세가 전세에 비해 세입자에게 불리할 게 없는 제도로 바꿔갈 필요가 있다. ‘갭투기’를 돕는 결과를 낳는 전세대출 지원보다는 주거비 직접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일정 소득액 이하 임차인에게 월세 소득공제를 크게 늘려야 한다. 주택 마련을 위해 전세보증금을 쌓기보다 장기주택마련 저축에 가입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공공 부문도 전세임대주택을 늘리기보다는 월세 지원을 늘려야 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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