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대구 중구 반월당역 인근에서 퀴어문화축제 쪽 무대차량 진입을 위해 교통정리에 나선 경찰관들과 이를 막으려는 대구시 공무원들이 대치한 가운데 대구시 한 간부 공무원이 부상을 주장하며 바닥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박수지 | 이슈팀장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하겠다.”
대규모 집회 전이나 유력 정치인 수사 때 경찰이 귀가 따갑도록 하는 말이지만, 실상 이 문장이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법치국가에서 경찰의 존립 근거는 사라진다. 법에 근거하지 않은 경찰의 자의적인 공권력 행사에 웃어넘길 수 있는 건, 그가 영화 속 마석도 경감일 때이다. (그는 피의자를 마구 때리고도 <범죄도시3>에서 승진했다!)
지난 3년 동안 대법원 앞에서 20여차례 열린 문화제를 경찰이 ‘사정 변경이 없는데도’ 집회로 해석해 참가자 한명 한명을 끌어내 직접 해산했다. 한달 새 두차례 벌어진 일이다. 경찰은 “미신고 집회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며 직접 해산의 근거를 댔다.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 시절 불법 집회에 대한 ‘미온적 반응’은 봐주던 것이고, 지금 하는 대응이 법과 원칙에 따른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경찰의 적법 행정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문제는 경찰이 대통령 말 한마디면 수차례에 걸쳐 확립된 대법원 판례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며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만으로 옥외집회·시위를 해산할 수 없다.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명백하게 위험이 초래된 경우’에 한해 해산을 명할 수 있다.”(대법원 2010도6388 등) 경찰 주장대로 해당 문화제가 미신고 집회일지언정 고작 수십명이 모여 노래를 틀거나 구호를 외치는 정도라 직접 해산에 나서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 판례에 대한 해석을 경찰에 요구하면, “어쨌거나 타인의 법익 위반이 있다”, “논란이 있다” 정도로 퉁치고 넘어간다. 직접 해산이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집행하는 것이다. “불법에 손 놓은 경찰”이라는 외부 비판이 있다면 경찰은 “판례상 불법 집회더라도 평화적으로 진행하면 직접 해산할 수 없다”고 당당히 대응하면 된다. 그게 아니니 말이 꼬인다. 직접 해산은 비례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에 “부드럽게 끌어냈다”(서울경찰청)는 식이다. 정부가 유행시킨 어느 표현에 빗대자면, 자의적 법 집행을 한 순간 그건 경찰이 아니라 ‘경폭’이다.
경찰의 이런 무리수는 법적 문제가 생겨도 조직이 확실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전례도 있다. 2013년 쌍용자동차 관련 덕수궁 대한문 앞 집회 신고에 경찰이 제한통고를 했지만, 법원은 신고자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법원 판단도 무시한 채 대한문 앞을 ‘절대 사수’한 당시 남대문서 경비과장은 이듬해 총경으로, 경찰서장은 2015년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몇년의 형사·민사재판에서 둘은 모두 졌지만, 경찰 조직에서 불이익을 당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민주노총의 1박2일 집회 직후 “법 집행 공직자들이 범법자들로부터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보호하겠다”며 경찰에 엄정 대응을 주문한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서울 경찰이 대법 판례까지 무시하는 동안, 17일 대구 퀴어축제에서는 시 공무원과 경찰이 맞서는 희한한 일이 있었다. “도로점용 허가 없이는 위법”이라고 홍준표 대구시장이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며 공무원을 대동해 축제를 막으려고 하자, 대구 경찰이 집회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축제 참가자들은 졸지에 “대구 경찰 파이팅”, “경찰 이겨라”라고 외쳤다. 홍 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축제 뒤 대구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휴대전화 너머로 명료하게 말했다. “집회는 신고제입니다. 집회에 차도를 쓰려고 지자체에 허가받아야 한다면 그건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입니다. 참가 인원이 적으면 경찰은 인도부터 안내하지만, 규모가 크다면 그에 맞춰 차로를 열어줍니다. 판례의 일관된 내용이죠. 다툼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구 경찰은 특별히 ‘퀴어 시민’만을 위한 마석도였던 게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단지 헌법과 집시법과 판례에 근거해 법을 집행했다. 그게 시민이 경찰에 기대하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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