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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K-저력에 구걸하는 민폐 정치

등록 2023-08-09 18:17수정 2023-08-10 10:36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했다가 퇴영한 일본 대원 천5백여명이 8일 오후 충북 단양군 구인사에 들어서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했다가 퇴영한 일본 대원 천5백여명이 8일 오후 충북 단양군 구인사에 들어서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뉴스룸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12일간(8월1~12일) 일정으로 계획된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가 전세계 청소년들의 야영 축제에서 한류 체험으로 급격하게 성격이 바뀐 채 마무리되고 있다. 예상된 폭염에도 터무니없는 준비 부족과 운영 미숙이 드러나면서 영국·미국 대원들이 철수하고 태풍 예보까지 이어지자, 결국 남은 156개국 3만7000여명 대원을 모두 철수시켜 전국 8개 시·도로 옮겼다. 지자체별 대체프로그램들에 이어 11일 저녁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케이(K)팝 공연으로 “잼버리 피날레를 감동적으로 장식할 것”(문화체육관광부)이라고 한다. 여당에서는 케이팝 공연에 일부 멤버가 군 복무 중인 방탄소년단(BTS)을 투입하도록 국방부가 협조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성일종 의원은 “국가가 어려울 때 비티에스만이 (…) 무너진 국격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대형 연예기획사 한 관계자에게 이런 상황에 관해 물었더니 “위기 상황이라고 영국 정부가 엘튼 존을 불러내나? 서구에서 보면 전제주의적 발상”이라며 열을 뿜었다. 폭우나 폭염에 대비할 지붕 없는 상암경기장에서의 두시간짜리 공연을 불과 사흘 준비 기간을 거쳐 치러내라는 ‘과감성’, 예술인을 ‘국격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언제든 차출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그는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해서 국가 위신 추락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근시안적 생각이다. 오히려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다.”

한국을 찾아온 젊은 손님들이 ‘엉망’과 ‘악몽’만 안고 돌아가게 할 수 없기에, 우리가 가진 역량을 활용해 행사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일은 필요하다. 케이팝 공연에 흔쾌한 마음으로 출연하는 아티스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는 정부가 치고 수습에 민간이 대거 투입되는 상황을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새만금 철수와 8개 시·도 분산 수용이라는 정부의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은 숙소와 대체프로그램 긴급 마련을 위한 ‘총동원령’ 결과다. 기업, 대학, 종교계가 연수원, 기숙사 등을 대원들 숙소로 내놨고, 문화·예술체험이나 관광 등 각종 프로그램을 꾸렸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진땀을 빼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공무원은 “코로나19 대응 때처럼, 지금도 기업, 대학들에 전화를 돌리고 있다”고 했다. 민간이 적극 동참하고 있지만, 이는 “위기의 나라를 살렸던 금반지 정신”(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으로 비장하게 무장해서도 아니고, “한국의 위기대응 역량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을 의도한 것도 아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시민들이 각자 얻은 자존심의 상처 때문이라고 보는 게 합당할 듯싶다.

지금 벌어지는 총동원 사태는 애초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이 기본만 지켰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새만금이 잼버리 개최지로 확정된 것은 2017년 8월이다. 지난 6년 준비기간 동안 사업비 1171억원이 들어갔다. 8월 폭염과 태풍이 갑자기 온 것도 아니다. 그늘 없는 간척지에서 수만명이 참가하는 대회를 진행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엇이었는지도 명백하다. 정부가 이해하기 어려운 잘못을 저지르고, 시민들은 ‘케이 저력’이라는 미명 아래 안 해도 됐을 괜한 수고와 걱정을 떠안았다. 정부와 정치권이 민폐를 끼치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립대는 잼버리 참가자 지원 문제로 내부 학생들에게 학생식당 이용이 어렵다고 안내했다.
서울시립대는 잼버리 참가자 지원 문제로 내부 학생들에게 학생식당 이용이 어렵다고 안내했다.

정치권은 이번 사태 초기부터 ‘네 탓’ 공방에 열을 올렸다. 잼버리 기반시설 준비는 전 정부에, 준비·운영은 현 정부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이 넘은 시점에서 ‘야당이 정부를 공격하는 것’과 ‘여당이 전 정부를 탓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보기 흉한지 또한 자명하다. 정치인들만 이걸 모르는지, 손가락질에 바쁘다. 정치가 시민들에게 ‘힘’이 아니라 ‘짐’이 되고 있다.

이번에도 우리는 민간 역량에 힘입어 어떻게든 이번 사태를 잘 마무리해낼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험이, 정부와 정치의 실패를 민간의 부담으로 전가하고, 그걸 ‘금반지 정신’ ‘위기대응 능력’으로 포장하는 관성을 키우지 않을까 걱정된다. 행사가 끝나고 ‘추궁의 시간’이 오거든 책임 공방만 벌일 게 아니라, 정권을 불문하고 정부·정치의 실패로 이번 같은 민폐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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