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일주일만 외국에 다녀와도 따라잡기 힘든 것이 한국 사회의 속도라고 했던가. 하도 빠르니 얼마 전 일도 금세 잊는다. 되돌아보고 살펴야 할 일이 많다. 국정원 사건이 꼭 그렇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국가정보원 여직원이 대통령선거 관련 댓글을 달다 발각됐을 때, 여당의 첫 반응은 ‘사실무근’이었다. 대신 ‘젊은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비난했다. 말은 자주 바뀐다. 올해 초 댓글 활동이 사실로 드러나자 ‘댓글은 정당한 대북 심리전’이라고 주장했다. 댓글이 선거에 대한 것임이 드러났을 때는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조직적 대선 개입이냐’고 했다. 최근 트위터 글 5만5천여건이 추가로 드러나자 ‘야당 지지자들은 트위터나 댓글을 안 했느냐’라거나 ‘대선 불복이냐’며 사뭇 삿대질이다. 사정을 거두절미한 채 단순 반응을 유도하는 선동 투여서, 물정 모르는 이들은 혹할 만도 하다.
이런 대응을 누군가 기획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도 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23일 “박근혜 지지자들만 트위터 쓰고 댓글 쓰는가. 공직자들이 그 사람들 외에는 트위터, 댓글 한 사람이 없나”라고 말했다. 며칠 뒤 새누리당 대변인이 똑같은 말을 했다. 발맞추고 말 맞춘 ‘홍보 지침’ 같다.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이 수석이 “조직적으로 개입됐는지는 모른다”거나 “재판 결과가 안 나왔으니 다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장차의 ‘처리 지침’일 수 있겠다. 또 있다. 공교롭게도 국정원 사건의 고비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따위가 터졌다. 트위터 글 5만5천여건이라는 증거의 엄중함에도 입 모아 검찰 내 결재 누락만 문제 삼았다. 이슈 전환, 프레임 변경 따위는 스핀닥터(왜곡 활동을 주로 하는 정치 홍보 전문가)들의 수법이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문제는 여권의 대응이 그것뿐이라는 데 있다. 대변인뿐 아니라 당 대표 등 여당 지도부까지도 스핀닥터들이나 할 만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뇐다. 야당을 비난하고 반박하는 가시 돋친 말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요체인 선거의 공정성이 국가기관에 의해 침탈됐고, 그 국가기관은 지금껏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민주제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다. 나라 안팎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는 아니라도 당장의 정치적 다툼이라도 풀어보려는 자세는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은 그조차 찾기 어렵다. 그저 청와대 기류만 살핀다. 조작·유도·은폐의 여론 관리만 있을 뿐, 대화·타협·공론으로 갈등을 해소해야 할 정치는 온데간데없다. 정치인 대신 스핀닥터들만 보이는 게 정상일 순 없다.
기능 부전은 정치만이 아니다. 국정원 사건에 선거법을 적용한 검찰총장은 추문을 쓰고 끌어내려졌고, 고집스레 수사에 매달렸던 수사팀장은 업무에서 배제됐다. 명목이야 무엇이건 어떤 역린을 거슬렀기에 그리됐는지는 안팎이 다 안다. 이제 검찰은 국정원 사건뿐 아니라 웬만한 일에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정권 예속은 가속화할 것이고, 국정원은 성역이 된다. 그런 검찰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국정원이라고 다르진 않다. 국정원은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국가의 민주제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 자체로 독을 내뿜은 일이다. 이를 덮으려 하면서 현실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제 정권의 버팀목처럼 돼버렸다. 하지 말아야 할 엉뚱한 일에 힘을 키우고 있으니, 그 역시 심각한 기능부전이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대통령은 말이 없다. 침묵의 정치라지만, 입을 앙다문 채 쏘아보는 것으로만 비친다. 그러는 사이 국가의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있다. 몸속 장기들이 제 기능을 못한 채 멈추거나 둔해지는 ‘다발성 장기부전’ 같다. 자칫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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