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다발성 장기부전’의 증상과 원인 / 여현호

등록 2013-10-27 19:13수정 2013-10-29 10:05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일주일만 외국에 다녀와도 따라잡기 힘든 것이 한국 사회의 속도라고 했던가. 하도 빠르니 얼마 전 일도 금세 잊는다. 되돌아보고 살펴야 할 일이 많다. 국정원 사건이 꼭 그렇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국가정보원 여직원이 대통령선거 관련 댓글을 달다 발각됐을 때, 여당의 첫 반응은 ‘사실무근’이었다. 대신 ‘젊은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을 비난했다. 말은 자주 바뀐다. 올해 초 댓글 활동이 사실로 드러나자 ‘댓글은 정당한 대북 심리전’이라고 주장했다. 댓글이 선거에 대한 것임이 드러났을 때는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조직적 대선 개입이냐’고 했다. 최근 트위터 글 5만5천여건이 추가로 드러나자 ‘야당 지지자들은 트위터나 댓글을 안 했느냐’라거나 ‘대선 불복이냐’며 사뭇 삿대질이다. 사정을 거두절미한 채 단순 반응을 유도하는 선동 투여서, 물정 모르는 이들은 혹할 만도 하다.

이런 대응을 누군가 기획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도 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23일 “박근혜 지지자들만 트위터 쓰고 댓글 쓰는가. 공직자들이 그 사람들 외에는 트위터, 댓글 한 사람이 없나”라고 말했다. 며칠 뒤 새누리당 대변인이 똑같은 말을 했다. 발맞추고 말 맞춘 ‘홍보 지침’ 같다.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이 수석이 “조직적으로 개입됐는지는 모른다”거나 “재판 결과가 안 나왔으니 다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장차의 ‘처리 지침’일 수 있겠다. 또 있다. 공교롭게도 국정원 사건의 고비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따위가 터졌다. 트위터 글 5만5천여건이라는 증거의 엄중함에도 입 모아 검찰 내 결재 누락만 문제 삼았다. 이슈 전환, 프레임 변경 따위는 스핀닥터(왜곡 활동을 주로 하는 정치 홍보 전문가)들의 수법이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문제는 여권의 대응이 그것뿐이라는 데 있다. 대변인뿐 아니라 당 대표 등 여당 지도부까지도 스핀닥터들이나 할 만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뇐다. 야당을 비난하고 반박하는 가시 돋친 말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요체인 선거의 공정성이 국가기관에 의해 침탈됐고, 그 국가기관은 지금껏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민주제도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다. 나라 안팎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는 아니라도 당장의 정치적 다툼이라도 풀어보려는 자세는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은 그조차 찾기 어렵다. 그저 청와대 기류만 살핀다. 조작·유도·은폐의 여론 관리만 있을 뿐, 대화·타협·공론으로 갈등을 해소해야 할 정치는 온데간데없다. 정치인 대신 스핀닥터들만 보이는 게 정상일 순 없다.

기능 부전은 정치만이 아니다. 국정원 사건에 선거법을 적용한 검찰총장은 추문을 쓰고 끌어내려졌고, 고집스레 수사에 매달렸던 수사팀장은 업무에서 배제됐다. 명목이야 무엇이건 어떤 역린을 거슬렀기에 그리됐는지는 안팎이 다 안다. 이제 검찰은 국정원 사건뿐 아니라 웬만한 일에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정권 예속은 가속화할 것이고, 국정원은 성역이 된다. 그런 검찰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국정원이라고 다르진 않다. 국정원은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국가의 민주제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 자체로 독을 내뿜은 일이다. 이를 덮으려 하면서 현실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제 정권의 버팀목처럼 돼버렸다. 하지 말아야 할 엉뚱한 일에 힘을 키우고 있으니, 그 역시 심각한 기능부전이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대통령은 말이 없다. 침묵의 정치라지만, 입을 앙다문 채 쏘아보는 것으로만 비친다. 그러는 사이 국가의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있다. 몸속 장기들이 제 기능을 못한 채 멈추거나 둔해지는 ‘다발성 장기부전’ 같다. 자칫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체포 뒤에도 ‘거부 남발’ 윤석열…전략이 아니라 착각이다 1.

체포 뒤에도 ‘거부 남발’ 윤석열…전략이 아니라 착각이다

대한민국 망치는 ‘극우 카르텔’…윤석열·국힘·태극기 부대 2.

대한민국 망치는 ‘극우 카르텔’…윤석열·국힘·태극기 부대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3.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윤석열 ‘바보 전략’인가 ‘바보’인가 4.

윤석열 ‘바보 전략’인가 ‘바보’인가

[사설] 경호처를 아부꾼으로 전락시킨 ‘윤비어천가’ 5.

[사설] 경호처를 아부꾼으로 전락시킨 ‘윤비어천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