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나의 금지 명령에 복종하지 마라.” 어머니가 이런 명령을 내린다면 아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내 말을 듣지 말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야 할지 따르지 말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뜻을 따르면 복종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따르지 않으면 복종하지 말라는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의 머리에선 쥐가 날 거다. 이게 바로 미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얘기하는 ‘이중구속’(the double bind) 상황이다.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불교 선사의 사례도 든다. “이것을 죽비라고 하면 (그것은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니) 죽비를 내리치겠다. 이것을 죽비라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니) 죽비를 내리치겠다. 너희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어떻게 말해도 스승의 죽비가 어깨를 후려칠 것임을 예감하는 제자들의 등골엔 진땀이 흐를 거다.
이중구속에 붙잡힌 사람은 정신분열 증상을 발전시킨다는 게 베이트슨의 가설이다.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전달받는 상황이 반복되면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상에서도 이중구속의 사례는 많다.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면서도 성적표만 받아 보면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부모도 아이를 이중구속하는 거다. 최고 권력자가 이런 이중구속의 상황을 유발하면 국민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꾸 상반된 메시지를 내놓으며 국민을 이중구속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박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을 언급하며 “여전히 과거의 정치적 이슈에 묶여서 시급한 국정 현안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로 가자는 얘기일 것이다.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제2의 새마을운동’을 펼치자고 하고, 유신헌법을 기초했던 인물을 비서실장으로 곁에 둔다. 미래로 향하자면서 70년대 복고댄스 스텝을 밟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이중구속에 빠진 듯한 스트레스를 받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수사 결과가 명확하고 국민들께 의혹을 남기지 않도록 나와야 한다”며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공무원 단체나 개별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라며 공무원노조, 교원노조를 슬쩍 겨냥한다. 이건 범죄를 저지른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책임자를 찾아서 문책하라는 얘긴가, 아니면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때려잡으란 얘긴가. 지금쯤 검찰은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인지 헤아리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100% 대한민국’과 국민대통합을 수없이 약속했지만 취임 8개월이 흐른 지금, 통합은 간데없고 분열만 나부낀다. 말로는 통합을 외치지만 실제론 정반대의 길을 간 탓이다. 박 대통령은 얼마 전 “새마을운동이 국민통합을 이끄는 공동체 운동이 돼야 한다”고 했다. 새마을운동과 유신을 한 묶음으로 연결지어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국민통합을 위해 새마을운동을 다시 펼치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중구속의 고통을 유발하기 십상이다. 지금쯤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을 거다.
이중구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연을 끊고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상대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의존해야 하는 부모이거나 도저히 연을 끊을 수 없는 사람일 때다. 이 나라 국민으로 사는 이상 대통령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으니, 대통령의 모순된 말과 행동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을 탐구하거나 이중구속의 고통을 견디는 수밖에.
임석규 정치·사회 에디터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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