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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입헌군주제 대한민국 / 여현호

등록 2013-11-24 19:07수정 2013-11-26 16:08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헌법을 읽는다. 제1조 제1항부터 걸린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8일 국회에서 단아하고 단호한 모습으로 시정연설을 했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사건 등 현안에 대한 그의 입장은 여전했다. 야당의 특검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국정원 개혁도 국정원의 자체 개혁안이 나오면 국회에서 논의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 합의점을 찾아준다면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중하지만, 앞뒤는 꽉 막혀 있다. 이미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을 정해둔 터에 청와대 눈치만 살펴온 여당이 재량껏 논의할 여지는 별반 없다. 야당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 선이니, 국회 존중은 말뿐이다.

더구나 자신이 직접 이해 당사자인데도, 그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하다. 다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여야가 합의해 오면 그 뜻을 가납하겠다는 투다. 짐짓 정치적 대립을 초월하려 한다. 같은 대통령제라지만, 상대 당 하원 대표와 무릎을 맞대고 논의하는 미국의 대통령과 다르다. 박 대통령은 야당 대표를 만날 때도 굳이 여당 대표와 국회 지도부를 함께 부른다. 여야를 넘는 국가지도자가 야당 대표와 겸상을 할 순 없는 것이겠다.

헌법의 역사는 이를 ‘군주제적 상태’라고 부른다. “정당과 세계관, 그리고 정치적 대립 위에 존재하는 통합적인 국민지도자”를 꿈꿨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모습(한스 포어렌더 <헌법사>)이 그랬다. 헌법제도로도 ‘국가원수’는 입헌군주제, 그중에서도 군주주권형 입헌군주제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혁명 뒤 1791년 프랑스 헌법에선 왕이 ‘행정권의 수반’에 그쳤지만, 왕정복고 뒤인 1814년 헌장에선 왕이 ‘국가의 원수’로 행정권뿐 아니라 법률안 제출권 등을 독점했다.

우리 헌법에서도 대통령은 ‘행정권의 수반’(제66조 제4항)이자 ‘국가의 원수’(제66조 제1항)다. 제헌헌법이나 5·16 쿠데타 뒤 1962년 헌법까진 대통령이 행정권의 수반이었을 뿐이다. ‘국가원수’는 1972년 유신헌법부터 덧붙여졌다. 그래서일까. 유신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에는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모두 국회 본회의장 국무위원석에 ‘배석’했다. 국가원수라고 생각해서였겠지만, 권력분립의 원칙과 공화정의 이름 아래선 실은 매우 어색한 장면이다.

퇴행은 이미 곳곳에서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반신반인”, “하늘에서 내렸다”, “님의 심장의 고동이 느껴진다” 등 신격화에 가까운 말들이 나오고, 고향에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 제국주의 일본의 천황 숭배가 꼭 이러했다. 아버지와 딸이 대통령 자리를 사실상 세습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군림하는 군주는 범접할 수도 없다. 대통령의 국회 연설 때 야당 국회의원이 청와대 경호경찰에게 당했다는 봉변은 서슬 퍼런 전제군주 시대엔 예삿일이었으리라.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다는 중간당직자가 당대표나 원내대표 등 허다한 고위직을 제치고 실세로 행세하는 것도 절대왕권의 역사에선 낯설지 않다. 측근 비서들이 인사와 정책을 쥐락펴락한다는 현실도 환관정치를 빼닮았다. 권력 주변 풍경은 왕정이다.

박 대통령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권위주의적·제왕적 대통령제의 유산을 되살리고 되레 더 강화하는 지금의 정치 행태는 그 자체로 민주공화정에 대한 위협이다. 정부기관의 선거 개입은 대의민주주의의 요체인 선거의 공정성을 뒤흔든 것이다. 국가폭력의 실체인 군이 ‘대내 심리전’이건 뭐건 그 힘을 국민에게 향했다는 것은 근대 입헌주의의 역사와 원칙을 한참 벗어난 것이다. 그런 헌법적 위험을, ‘헌법을 수호할 책무’(헌법 제66조 제2항)를 지닌 대통령이 외면해선 안 된다. 팔을 걷어붙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다. 무슨 험한 꼴을 더 보려고 여태 외면하는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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