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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민족반역자의 추억 / 권혁철

등록 2018-02-18 18:43수정 2018-02-18 19:08

권혁철
사회2 에디터

1988년 봄 대학가에서는 남북학생회담 논의가 싹트고 있었다. 당시 학교 신문사에서 일했던 나는 남북학생회담 주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학교신문에 썼다. 내 비판의 요지는 남북학생회담은 감상적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돌출적 주장이고, 학생운동은 당시 현안이던 서울지하철 투쟁 등과 결합해 노학연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칼럼에 항의하는 편지가 학교 신문사로 여러 통 날아왔다. 나는 독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해명과 반박, 재반박 등 토론을 이어갔다. 이 토론은 ‘통일을 반대하는 당신은 민족반역자’란 최후통첩성 독자 편지로 끝났다.

당시 나는 남북학생회담 제안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오판이었다. 그해 봄과 여름 대학가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란 구호로 들끓었다. 1988년 6월 판문점으로 가는 길목인 서울 홍제동 도로에는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남북학생회담을 요구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평소 디스코텍에서 춤추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의 가슴에 조국통일투쟁의 불을 지폈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 가지 차원의 당위가 작용한 것 같다. 첫번째 당위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학생회담을 해야 한다’는 게 두번째 차원의 당위였다. 당위는 ‘무엇이 옳다’는 판단이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당위는 너무나 명백해 토론이 필요 없다. 1988년 봄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쪽에서 보면 당시 나는 ‘왜 살인을 하면 안 되느냐’며 황당한 시비를 거는 불한당이었다.

군사독재가 힘을 쓰던 1980·90년대에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조국통일투쟁에 구름 같은 군중을 모았다. 2000년 이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온겨레가 눈물을 흘렸다.

이런 기억 때문에 나는 평창겨울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둘러싼 논란을 전혀 예상 못 했다. 솔직히 나는 평창겨울올림픽을 지렛대 삼아 전쟁 위기에 놓인 한반도에서 평화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뒤늦게 남북단일팀 논란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 주장과 정서가 읽혔다. 첫째는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했으니 내가 보탤 말은 없다.

둘째는 ‘북한이 싫다’는 혐북 정서이다. 일부는 북한을 오해·반대의 대상을 넘어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나 북한 응원단 관련 기사 온라인 댓글을 보면 혐북이 차고 넘친다. 예를 들면 ‘북한 응원단이 거슬린다. 거지가 우리보고 절친이라는데 쪽팔린다’는 식이다. 특히 젊은층에 혐북 정서가 강해 보였다.

지난 11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과 소녀시대 서현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통일이냐, 평화냐’ 하는 남북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래된 딜레마가 떠올랐다. 거칠게 요약하면 평화는 ‘분단 관리’이고, 통일은 ‘분단 변경’이다. 30년 전 대학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이 당위다.

서현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는 나의 가슴을 울렸지만, 머릿속으로는 평화가 통일보다 지금 상황에서 더 현실적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처럼 전혀 준비 없이 성급한 통일을 당위적으로 주장할 게 아니라, 남북이 싸우지 않고 공존의 경험과 지혜를 하나하나 쌓아나가야 할 때란 것이다. 이를 통해 남북 간 실질적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우리 안의 혐북 정서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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