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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촛불 이후의 촛불, 미투 / 이재성

등록 2018-03-11 17:48수정 2018-03-11 19:01

이재성
사회1 에디터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행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대목은 그가 피해자에게 했다는 말이었다. “너의 생각을 얘기하지 마라. 너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투명하게 비춰라.” 민주주의자를 자처했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은 안희정 대선 캠프에서 일했다는 사람들의 후속 증언으로 다시 한번 확인됐다. 폭력과 성희롱이 일상이었다는, ‘대통령 만들러 왔다’는 대의에 숨죽여 복종하길 요구하는 비민주성이 결국 수많은 사람의 공분을 산 이번 사건을 잉태한 것 아닐까.

문단이나 운동권 내부 등에서 간간이 이어졌던 미투 운동이 최근 본격적으로 불붙고 있는 건 이른바 ‘촛불 효과’로 보인다. 최장집 교수 어법을 빌리면, ‘촛불 이후의 촛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정농단 세력을 몰아낸 ‘박근혜 탄핵 촛불’ 이후를 전망하면서 많은 전문가가 이제 남은 과제는 일상의 민주주의 달성이라고 말했었다. 학교와 일터, 교회 같은 공동체로 민주주의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 이후 ‘직장 갑질’을 비롯한 각종 갑질 폭로가 이어졌다. 주로 생사여탈권을 쥔 이들의 권력형 갑질이었는데, 그중의 한 축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폭력이었다. 성심병원이 간호사들로 하여금 민망한 걸그룹 공연을 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의 폭로 역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해방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운동은 늘 후순위였다.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보장된 건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으로부터 157년이 지난 1946년이었고, 미국의 경우 흑인 노예에게 참정권을 준 지 50년이 지난 1920년에야 여성의 참정권이 최종적으로 허용됐다. 미투 운동이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걸 보면 참정권 획득 이후에도 전 세계 여성의 처지는 여전히 불안하고 예속적인 게 사실이다. 선진국이지만 여권이 약한 일본 같은 곳은 아직도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성평등 쟁취 투쟁 역시 기득권층의 반발 속에 진행된다. 문제는 이 경우 기득권층(남성)이 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촛불과 견주면, 기득권층의 일부가 박근혜 탄핵을 지지함으로써 촛불이 승리할 수 있었듯이, 미투 운동의 성패는 남성들이 얼마나 공감하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시작은 남성들이 젠더 기득권층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이에도 남성은 우위를 점한다. 프랑스가 최근 캣콜링(지나가는 여성에게 하는 남성의 휘파람 소리 또는 성적인 발언)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나 역시 기득권층 남성으로서 여성들의 처지를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1990년대 중반, 확신에 찬 페미니스트였던 친구의 소개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경험했고, 그 뒤로 숱하게 이어진 성폭력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반면교사의 교재로 삼았지만, 모두 불충분한 ‘학습’에 불과했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현기증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남자들도 있다. 이럴 땐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뒤집어보는 상상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같은 일을 남자인 내가 당했다면, 지금 남자들이 느끼는 이 엄청난 충격을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는 과정을 반복했다면…. 공감한다면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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