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국제뉴스는 한국에서 더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때 국제뉴스를 지면에서 전진 배치하자는 논의가, ‘고급지’가 되려면 국제뉴스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도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4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볼 때, 교역을 통한 경제 외연의 확장 정책을 추구해온 내력을 볼 때, 해외여행이 계속 증가해온 추세를 볼 때 역설적인 현상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국제뉴스가 독자들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졌다기보다는, 언론사가 독자들의 수준과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이제 독자들은 ‘세상에 이런 일이’ 부류의 가십성 기사보다는 깊이 있는 분석에, 외신이 전하는 소식보다는 ‘한국 기자’들이 발로 뛰며 취재한 현장성 국제기사에 후한 평가를 내린다. 국제뉴스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 몇가지 이유를 추정은 해볼 수 있다. 언론 통제가 심했던 70,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광주민주화항쟁과 같은 민감한 국내 정보나 사회주의권 소식은 외신을 타고만 흘러들어 왔다. 국제부는 정보의 ‘집합소’였다고, 한참 위 선배들은 전한다. 민주화가 되면서 이제 이런 유의 국제뉴스는 정치·사회 쪽에 자리를 내줬다. 90년대 말 인터넷의 발달은 일반 국제뉴스에 대한 독자들의 정보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한국어로 번역된 외신 기사를 클릭만 하면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해당 분야나 국가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전문가는 인터넷으로 원본 기사를 직접 찾아 읽는다. 신문사에 하루 뒤 배달되던 외국의 인쇄매체들은 말 그대로 종잇조각이 돼버렸다. 국제뉴스는 더는 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변화된 국제뉴스 환경을 뛰어넘는 방법은 국내 기자가 직접 현장을 찾아가 르포 기사를 쓰고 깊이 있게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장벽 현장을 가는 것, 미-중 무역전쟁의 현장을 가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독자들의 높아진 요구였다. 외국 언론들을 통해 번역되는 기사는 아무리 현장성이 있다고 한들 생생함과 시각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눈치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싱턴이나 도쿄, 베이징 등에 파견된 각 언론사 1~2명의 한국 특파원들은 대체로 한국 관련 뉴스의 주문을 처리하기에도 바쁘다. 북핵 문제, 한-일 관계 등은 언론사 안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매기고 이른바 ‘종합면’으로 진출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고 특파원들도 거기에 적응하게 된다. 또한 특파원이 아닌 국내 기자를 국제뉴스가 벌어지는 현장에 보내는 것은 늘 투입 대비 ‘가성비’를 따져야 하므로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요컨대 언론사들의 열악한 재정 인프라가 국제뉴스에 대한 독자들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데 장애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모든 외교를 빨아들이는 ‘북핵 블랙홀’이 더해지면서 국제뉴스를 바라보는 범위나 시각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4강 순방’ 이외에 역대 대통령의 아시아나 유럽 순방 기사는 늘 “기사가 안 된다”며 지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다. 그러다 보니, 청와대는 ‘북핵’이나 ‘북한’을 억지로라도 연결해 홍보자료를 낸다. 언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북한 아닌 외교’는 관심의 사각지대가 되거나 감시의 사각지대가 된다. 무관심이 무관심을 부르는 악순환이다. 동남아시아에 ‘특파원’을 파견하는 것부터 국제뉴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보자. ‘가성비’나 거리, 독자들의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시도할 만하다. 아세안은 제2의 교역 상대국이다. 남중국해를 비롯해 무역분쟁에 이르기까지 미-중 갈등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외교·안보뿐 아니라 인권, 식민지 역사 등 사회문화적으로 연대할 일도 적지 않다. 대다수 일본 지역신문들조차도 동남아시아에 특파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 지역신문의 재정능력이나 여론 영향력이 한국보다 상당히 크기는 하지만, 풀뿌리 일본의 시선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관심의 폭과 깊이를 넓히지 않는 극일은 기껏 반쪽짜리일 뿐이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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