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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영등포 쪽방촌을 통한 미래 / 최은영

등록 2020-05-28 18:22수정 2020-05-29 02:38

최은영 ㅣ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1980년대 후반 개별 가구가 단독으로 화장실을 사용하는 집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화장실에서 휴지 못지않게 구겨진 신문지가 흔히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여러 가구가 화장실 하나를 사용하는 집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서울역과 영등포역 바로 뒤편에 있는 쪽방촌에서는 여전히 공동화장실과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 찬물만 나오는 수도꼭지가 부엌을 대신하는 이곳에서는 좁은 방에서 휴대용 버너로 음식을 조리한다.

쪽방촌 주민 다수는 고령의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가 지급하는 주거급여로 월세를 내고 있다. 2019년 동자동 쪽방촌 조사 결과를 보면 평균 월세는 23만3000원으로 서울에서 1인 가구가 최대로 받을 수 있는 주거급여액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주거급여액이 오르면 수급자의 주거환경은 그대로인 채 월세도 따라 오르는 ‘빈곤 비즈니스’가 성행한다. 쪽방촌 주민이 공공임대주택으로 이주해도 또 다른 취약계층이 쪽방촌을 채우는 문제도 지속되고 있다. 건물이 워낙 노후해 집수리도 대안이 되기 힘들다. 정책 수단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쪽방촌은 오래된 난제로 남아 있었다.

2020년 1월20일, 용산참사 11주기였던 그날 정부는 50년 된 영등포 쪽방촌 정비 계획을 발표했다. ‘주민 재정착을 위해 공공주택특별법을 기반으로 공공이 토지를 수용해 직접 개발한다’는 전에 없던 계획이었다. 적극 행정이라고 하기에는 무모해 보일 정도의 누군가의 고뇌에 찬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는 나의 상상력 밖에 있는 창의적인 해법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이 동원된 계획이기도 했다.

‘개발 후 단지 내 상가에서 기존 상가세입자가 영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시행된 사례가 거의 없다. 상가세입자 대책 없는 용산4구역 개발 추진이 남일당 망루에서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의 중요 원인이었다. 당시 철거민들이 요구했던 임대상가가 영등포 쪽방촌의 이주대책에 포함되어 있는 걸 보면서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 사회는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뒤로 처지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오랫동안 법과 제도의 빈자리를 사람들이 채워왔다. 쇠파이프로 무장한 철거 용역을 막고자 철거민들이 맨몸으로 나섰고, 수많은 대학생이 그들과 함께했다. 제정구 의원, 정일우 신부, 김수환 추기경도 그들 곁에 있었다.

법과 제도를 통해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게을리한 결과 2018년 한국을 공식 방문한 유엔 주거권 특보는 ‘한국의 개발 관련 법제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노동의 종말>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은 코로나바이러스 케이(K)-방역 관련 <한국방송>(KBS) 인터뷰에서 ‘위기 때만 소외계층을 도와주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한국은 빈곤층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더 나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시스템의 개선은 개발 관련 법제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영등포 쪽방촌 개발 계획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 피와 눈물이 아닌 법과 제도가 약자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미 개발 계획이 발표된 영등포와 대전의 쪽방촌 외에 서울 4곳, 부산 2곳, 인천·대구 1곳씩 8개의 쪽방촌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희망 고문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빠른 결단과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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