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지미 샴, 리척얀, 조슈아 웡. 홍콩/정인환 특파원, AP 연합뉴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같았던 홍콩인들의 지난 1년 처절한 싸움으로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홍콩인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중국 당국은, 삶의 방식과 법치·자유가 위협받는 데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에 귀를 닫았다. 중국 당국은 홍콩과 대륙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았다. 이 벽을 허물려는 길고 힘든 노력에서 길은 만들어질 것이다.
2019년 6월9일, “송환법 반대, 악법에 저항” 등의 푯말을 든 사람들의 끝없는 물결의 맨 앞에서 행진하던 지미 샴은 이날 103만명 홍콩인이 송환법(범죄인 인도조례) 반대 시위에 함께했다고 선언했다.
지도자도 조직도 없이 각계각층 홍콩인들의 여론이 흐르고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루는, ‘물처럼 흐르는 시위’의 ‘소집인’ 구실을 한 지미 샴은 동성애 인권운동단체인 ‘무지개 행동’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인권운동가다. 2018년 홍콩 민주파 정치·인권 단체들의 연대모임인 민간인권전선의 소집인을 맡은 그는 이듬해 홍콩 정부가 범죄인을 중국에 인도할 수 있게 하는 송환법을 제정하려는 데 맞서며 역사의 급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지미 샴은 시위 1주년을 맞은 지난 6월 홍콩 <중신문> 인터뷰에서 “당시 103만명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시위가 끝나기도 전에 홍콩 정부는 민심을 무시하고 송환법 초안을 입법회 심의에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모두가 100만명 넘게 모였으니 송환법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던 그때, 그 소식이 전해지자 천당에서 곧바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끝없는 분노가 생겨났다. 들판이라도 태워버릴 것 같은 분노였다”고 회상했다.
6월12일 시위대가 송환법 심의를 막으려 입법회를 포위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며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했다. 15일 람 행정장관은 “입법을 보류하겠다”고 했지만 법안의 철회는 거부했다. 16일 2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법안의 완전 철회와 경찰 폭력 처벌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은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더 이상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돌아보면, 1년 넘게 계속된 시위 내내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정부는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설득하려는 작은 신호조차 내놓지 않았다. 홍콩인들은 시진핑 시대 들어 크게 악화된 중국 대륙의 권위주의, 통제, 감시가 홍콩인들에게도 강요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일국양제’ 약속에 보장된 홍콩인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고 민주화를 진전시키길 원했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홍콩인들의 완전한 복종이었다.
정치적 대화는 없었고, 폭력은 잔인했다. 7월21일 지하철 위안랑역에서 폭력배들이 시위 참가자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지만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가 괴한들과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도 공개됐다. 조사도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의 폭력, 시위 참가자들의 실종과 석연치 않은 죽음들, 시위를 주도한 운동가들에 대한 습격이 이어졌다.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다. 비폭력 시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대다수가 평화 시위를 이어갔지만, 경찰과 대치하는 선봉에선 청년들이 폭력으로 경찰에 맞서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기관을 공격하고 오성홍기와 중국 국가 휘장을 훼손하고, 중국 기업들의 홍콩 내 매장을 공격했다. 언제라도 체포되거나 ‘의문사’당할 수 있다고 불안해하면서 많은 청년이 유서를 써두고 시위에 나섰다.
2019년 8월31일 홍콩 청년들이 빗속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홍콩/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슬픔과 분노, 깊은 정치적 각성의 시간이 흘렀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각자도생에 바쁜 이들로만 여겨졌던 ‘홍콩인’들은 껍데기를 깨고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유와 법치가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거리로 나서고, 이전에는 무관심했던 노동조합과 조직을 만들고, 시위를 지지하는 상인들과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홍콩의 정치는 친영국 엘리트들과 부동산 재벌·자본가들만의 것이었다. 1997년 홍콩을 ‘반환’받은 중국 당국도 영국 식민정부의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뒤, 특권층에만 부와 정치권력이 집중되는 체제를 개혁하지 않았다. 식민정부와 유착했던 재계와 엘리트는 이제 중국 중앙정부와 밀착했고, 거대한 대륙 시장에 진출해 더욱 큰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의 민심이 반영될 정치적 통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홍콩에 몰려온 중국 특권층들의 자금은 서민들의 삶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과 임대료, 중국 출신 이민자들의 좋은 일자리 독점, 부동산 재벌과 기업들의 규제 받지 않는 투기, 엘리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통치 행위가 공공연했다. 홍콩 지니계수 0.520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도시임을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운동, 민주화운동이 꾸준히 성장했다.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시위를 진심으로 응원한 홍콩인들에게 인민해방군의 유혈진압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이란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대륙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의지도 불러일으켰다. 30년 넘게 홍콩 시민단체들은 중국 대륙의 노동자를 지원하고 인권운동에 힘을 보탰다. 비록 지금은 대륙에서 자유와 민주가 완전하게 실현될 수는 없더라도 홍콩은 ‘중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대안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홍콩 반환 이후 10여년 동안은 중국 당국이 홍콩 민심에 유의하는 태도를 보였고, 홍콩인들 사이에 중국에 대한 공감과 중국인이란 정체성이 높아졌다
시진핑 시대 들어 2014년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인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행정장관 직선제를 사실상 중국 정부가 승인한 후보들만 출마할 수 있는 선거로 제한했고, 이에 항의한 홍콩 시민들이 79일간 중심지역을 점거하고 진정한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최루탄에 우산으로 맞선 청년들이 중심에 섰고, 당시 17살이던 조슈아 웡은 이 운동을 이끌며 새로운 정치세대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우산혁명’이라 불린 이 운동은 철저히 비폭력 시위 원칙을 지켰고, 독립 요구도 전혀 없는 온건한 시위였지만, 중국 정부로부터 어떤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 경찰에 해산당했다.
우산혁명이 좌절한 이후 ‘우산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중국 시민사회 지원에 큰 관심이 없다. ‘중국은 남’이고 우리는 ‘홍콩인’이란 정체성이 높아졌다. 홍콩 민주화를 넘어 홍콩 독립을 강조하는 ‘본토주의’ 단체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홍콩에서 원정출산, 싹쓸이 쇼핑, 부동산 투기를 하는 대륙인들에 대한 노골적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종주의’적 주장도 나왔다.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 일부가 미국과 영국 국기 등을 흔들면서 외국 정부의 개입을 요구한 것은 논란과 파장을 몰고 왔다. 조슈아 웡 등은 외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압박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미국 의회에 홍콩 정부를 제재할 수 있는 인권·민주주의 법(홍콩인권법)을 통과시킬 것을 촉구했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조슈아 웡이 “사방팔방 다니면서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외국에 구걸하고 다니는 자”라고 비난했다. 중국공산당은 이 지점에 주목했다. 중국 관영언론들은 미국·영국 국기를 흔드는 극소수 시위대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홍콩 시위대를 국가를 분열시키려는 “매국노”로 비난했다.
중국 지도부는 홍콩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이들의 절박한 시위를 안보 불안의 문제로만 보았다. 시진핑 주석 집권 뒤 2014년 6월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이 발간한 <홍콩특별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 실천> 백서는 “외부세력’이 홍콩을 이용해 중국 내정에 간섭하려는 시도를 시종일관 경계해야 한다”며 위기 의식을 강조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고조된 상황에서 홍콩 시위가 계속되자, 중국 당국은 미국이 홍콩이란 약한 고리를 이용해 중국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중국과 홍콩 정부가 시위대와 소통할 뜻을 보이지 않고 경찰이 폭력적 진압을 계속하자, “광복홍콩, 시대혁명(홍콩 해방, 우리 시대의 혁명)”이 시위대의 주요한 구호로 등장했다.
2019년 11월19일 홍콩 이공대학교 내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전력질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 학생들은 전원 경찰에 붙잡혀 연행 되었다. 홍콩/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중국은 초강경책으로 응수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미뤄졌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5월22일 개막하자마자 홍콩 국가안전법(보안법)을 제정한다고 공표했다. 미국과 유럽 등이 코로나19의 수렁에 빠져 있던 시기에, 중국은 홍콩 의회인 입법회를 제쳐두고 전인대에서 보안법을 속전속결로 통과시켰다.
6월30일 밤 11시 홍콩 국가안전법(보안법) 시대가 막을 올렸다. 중국과 홍콩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에 대해, 분리독립·체제전복·테러행위·외세결탁 등의 혐의가 적용되면 최고 종신형으로 처벌된다. 보안법은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칼날이 됐다. 언제 어디서 홍콩인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지 모른다. 홍콩 정부는 홍콩인들이 민의를 표현할 마지막 통로로 기대했던 입법회 선거를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조슈아 웡을 비롯한 민주파 정치인 20명은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 정치인들, 언론사 사주까지 보안법으로 체포됐다.
2019년 11월22일 홍콩섬 센트럴의 금융 중심가에서 사무직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연대집회를 열고 있다. 송환법 공식 철회,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적 조사 등 시위대의 5가지 요구 사항을 지지하는 의미로 다섯손가락을 펼치고 “홍콩을 구하라”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홍콩/ 김봉규 선임기자
보안법이 드리운 공포의 먹구름 아래서, 많은 이가 절망하고 떠나고 있지만, 남아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도 깊고 치열해졌다. 중국 당국에 대한 분노가 커졌지만, 한편에선 중국과 홍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중국 민중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홍콩의 좌파 활동가·연구자 그룹 라우산은 지난 5월22일 발표한 글에서 “최근 홍콩 민중운동은 ‘중국’을 ‘이웃 나라’ 혹은 적대적 대상으로 보는 논법을 써왔지만 이런 논리로는 중국공산당의 민족주의에 맞설 수 없다”며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억압당하고 있는 대륙 내의 인민들과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륙의 노동·인권 운동을 30여년 동안 묵묵히 지원해온 리척얀 홍콩직공회연맹 비서장은 8월 <입장신문> 인터뷰에서 압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대륙의 운동가들과 같은 각오로 계속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대륙의 독재체제 아래서 인권운동가들이 계속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도덕적인 힘이다. 보안법이 한 걸음 한 걸음 핍박해오는 지금, 나는 끝까지 남아서 싸워야 할 책임이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신념과 언론 자유를 지키고 도덕적인 힘을 발휘하며 길게 싸우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며.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같았던 홍콩인들의 지난 1년 처절한 싸움으로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홍콩인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중국 당국은 삶의 방식과 법치·자유가 위협받는 데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에 귀를 닫았다. 중국공산당은 시위대를 미국 등 외세에 협력해 중국을 뒤흔들려는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 틀에 가두었다. 이는 공산당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 즉 홍콩 시위가 중국 내부에 영향을 미쳐 현실에 불만을 느끼는 이들이 홍콩 시위에 동조하고 연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전략이었다. 중국 당국은 홍콩과 대륙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벽을 높이 쌓았다. 이 벽을 허물려는 길고 힘든 노력에서 길은 만들어질 것이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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