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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선배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시라 / 석진환

등록 2021-04-28 18:51수정 2021-04-29 02:39

지난 21일 대한변호사협회가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제10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를 1200명 이내로 확정하라는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변협 제공
지난 21일 대한변호사협회가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제10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를 1200명 이내로 확정하라는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변협 제공

석진환ㅣ사회부장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는 글을 쓰는 직업 탓에, 내게 ‘오탈자’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되도록 마주치지 말았으면 하는 골칫거리다. 큰 글자의 신문 제목을 다루는 내 주변 동료 편집기자에게는 그 이상의 두려움이다. 제목에 ‘오탈자’가 있다는 말이라도 전해 듣게 되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충격과 후유증도 꽤 오래간다고 한다.

그런데 기자를 포함해 글을 다루는 사람들보다 ‘오탈자’에 더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이들이 있다. 법을 공부하는 로스쿨 학생들이다. 이들에게 ‘오탈자’는 피하고 싶은 실수가 아니다. 청춘의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나락이다. 여기서 오탈자는 ‘글이나 인쇄물에서 잘못되거나 빠뜨린 글자’의 의미가 아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오탈자’를 치면 맨 위에 나오는 뜻은 이렇다. ‘오탈자(五脫者)란, 로스쿨 석사학위 취득 후 5년 내에 5회만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제도에서, 5번 응시 기회를 소진하거나 잃은 수험생을 뜻한다.’ 오탈자는 올해 240여명, 변호사시험 도입 이후 누적 1000명 정도에 이른다. 멀쩡한 단락과 문장 사이에서 자신만 오탈자 취급을 받는 듯한 이들의 절망과 고통은 함부로 짐작하기 어렵다.

그중엔 학업을 게을리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핵심 이유가 기득권의 해묵은 ‘밥그릇 지키기’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 지금 진행 중인 기막힌 상황이 이런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21일 제10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합격자를 1200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합격자 수를 1706명으로 결정하자, 이번엔 변호사 개업에 필수인 실무연수 인원을 지난해 789명에서 올해 200명으로 줄이겠다고 엄포를 놨다. 변협을 제외한 나머지 실무연수 자리가 1000명 정도이니, 당장 500명은 시험에 합격하고도 갈 곳이 없게 된다. 실무연수를 못 받게 하는 ‘실력 행사’로 변호사 500명의 시장 진입을 막아, 1200명 증원 수준으로 맞추겠다는 횡포다.

매년 반복되는 기성 변호사 집단의 ‘반발’ 탓에 변호사시험 합격률도 1회 시험 87%에서 10회인 올해엔 54%까지 낮아졌다. 로스쿨 학생들은 “합격자 수 축소를 주장하는 핵심 인사들은 합격률이 높았던 변호사시험 1, 2회 출신인데, (그들이) 더 힘들게 공부해 더 점수를 잘 받은 후배들을 탈락하게 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한다.

사실 변호사시험은 일정 실력 이상이면 면허를 주는 자격시험이어야 한다. 정부가 이 시험에 정원을 정해 사실상 ‘취업고시’처럼 운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마저도 이미 ‘취업’한 기득권이 개입해 신규 인력의 시장 진입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사법시험 시절 합격자 정원이 100명에서 300명으로 늘 때, 다시 1000명으로 늘 때, 로스쿨 전환 이후 1500명대로 다시 늘어날 때도 그랬다. 선배 기득권 변호사들은 그때마다 “변호사 시장 포화”, “서비스 질 저하”를 주장하며 몽니를 부렸다. (인구 1만명당 한국의 변호사 수는 국외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다.)

변호사 단체와 로스쿨 학생들의 갈등은 조금 더 노골적이긴 해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축소판이다. 성과급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무직 노조까지 만들며 윗세대에 공정을 요구하는 2030세대의 불만은 로스쿨 학생들의 답답함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안착했으니, 이제 진입장벽이 높아지길 은근히 바라는 기성세대의 ‘아파트 욕망’과도 한몸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대형 로펌을 예약한 ‘금수저’는 이런 갈등에서 벗어나 있다.

연수 대란을 앞둔 500명의 합격자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해결책은 나오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음이 궁금하다. 변호사가 되면 그들은 선배들과 다를 수 있을까.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꼰대 같지 않은 말로 큰 울림을 남기고 떠난 고 채현국 선생의 발언이 다시 아른거린다. 다른 건 몰라도, 선배 변호사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로스쿨 학생들이 똑똑히 봐두었으면 한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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