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22일 경기도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방한 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향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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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9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와 교전 중인 러시아는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자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미국 주도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고,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비우호국으로 분류하면서 한-러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강행하면 한-러는 적대 관계로 돌변하고 만다. 경제·외교·안보적 손실과 위험을 떠안으면서 말이다.
윤 대통령이 교전국에 무기 지원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뒤흔든 건, 4월 하순에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한국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압박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의 입장이 궁금해 국가안보실 고위관계자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미국의 도청 파문은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미국이 동맹국을 상대로 불법적인 결례를 저지른 만큼, 미국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면서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인도적·재정적 지원에 국한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거꾸로 가고 말았다. 서둘러 미국에 외교적 면죄부를 주면서 도청 파문을 한-미 동맹을 강화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로 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한국이 성찰해야 할 지점은 이보다 훨씬 넓고도 근본적이다. 우선 최근 유출된 미국 기밀문서에 담긴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군의 ‘춘계 대반격’ 성공 가능성을 낮게 봤을 뿐만 아니라 5월께에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이 붕괴될 우려도 있다고 판단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국외교협회의 리처드 하스 회장과 찰스 컵천 조지타운대 교수도 최근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러시아의 고전과 우크라이나의 선전에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는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교착상태”라고 진단했다.
한-미 간 대화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 되었어야 한다.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조야에서조차 러-우 전쟁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만큼, ‘가능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놓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전쟁의 장기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이미 국제사회에서 일고 있는 평화협상 중재 움직임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한-미 동맹도 동참하는 것은 어떤지 등을 놓고 얘기를 나눴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승리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미국식 범위’에 너무나도 쉽게 갇히고 말았다.
윤석열 정부가 무기 지원 불가 입장을 미국에 전달하면, 당장은 미국이 섭섭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도 ‘아, 한국의 기여는 대러 제재 동참과 대우크라이나 인도적·재정적 지원까지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나토 회원국들을 제외한 미국의 여러 동맹국들도 이런 선택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이 미국의 범위에 갇히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에 몰리고 만다. 무기 지원과 관련해 미국에 여지를 주면 미국은 자꾸 채근하고 윤석열 정부는 꼼수를 생각하게 된다. 올해 3월 정부 및 방산업체가 국산 155㎜ 포탄 50만발을 판매가 아니라 대여 형식으로 미국에 제공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는 이 와중에 나왔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이라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러-우 전쟁에 관한 의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무기 지원 불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대화의 수준을 ‘전쟁과 평화’라는 근본 문제로 격상해야 한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 주민들이다. 또 에너지와 식량 수급도 불안해지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개발도상국들과 국경을 초월해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가고 있다. 미국 등 서방 진영의 관심이 온통 러-우 전쟁에 쏠리면서 실존적 위협으로 인류 앞에 성큼 다가온 기후위기 대처도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한국이 미국의 진정한 친구라면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러-우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를 규탄하고 제재했던 나라들은 줄어들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인 지난해 3월 유엔 총회 표결에서 대러 규탄에 동의하지 않는 나라는 52개국이었는데, 지난해 11월 표결에선 99개국으로 치솟았다. 반면 미국의 위선과 진의를 묻는 나라는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불법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20년이 지나도록 사과 한마디 없다. 2020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전쟁범죄 혐의를 수사하겠다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재를 가했다. 그러고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선 ‘정의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종전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아프리카·남미의 개발도상국)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위선과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까? 미국 등 서방이 개발도상국 문제에 무관심한 사이에 중국이 그 틈을 빠르게 치고 들어가고 있는데, 이런 양상이 미-중 경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러-우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경제 불안은 미국도 피해 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립주의의 재부상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인플레이션감축법과 반도체법을 중심으로 동맹국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미국 경제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지속가능할까? 친구라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자면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한다. 세계에는 미국이나 미국에 동조하는 나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미국’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윤 정부는 “글로벌 코리아”를 표방하고 있는데, 실상은 ‘아메리칸 코리아’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미국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다. 반미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제력 세계 10위, 군사력 세계 6위로 올라설 만큼 근력은 강해졌는데 과연 지적 능력은 어느 수준인지, 잠시라도 멈추고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평화다’라는 믿음으로 평화 활동과 연구를 해오고 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