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7년도 예산안과 관련해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잠시나마 블랙홀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꺼낸 ‘개헌’ 얘기다. 최순실 게이트도 살짝 덮이는듯 했지만, 이내 역부족이란 것이 확인됐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덮었다. 바로 박 대통령이 연설 초반부에 나열한 국정성과다. 안타깝게도 이튿날까지 어느 언론도 국정성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연설 후반부에 개헌을 화두로 꺼내며 현 체제에서 “국가적 정책현안을 함께 토론하고 책임지는 정치가 실종”됐다고 지적했다. 여의도 윤중로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그 실종된 정치를 되찾기 위해 대통령이 언급한 국정성과를 하나하나 검증해 보았다.
국정 성과 자화자찬했지만…
박 대통령은 연설 서두에서 “작년 벤처투자 및 펀드조성액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실제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2015년 벤처펀드 투자동향’을 살펴보면, 지난해 벤처기업에 투자된 금액은 2조858억원으로 2000년 벤처붐일 때의 2조211억원을 넘어선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벤처펀드조성액도 2조6260억원으로 한 해 전보다 618억원 늘어난 역대 최고액이었다. 나름대로 정확한 사실을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한 셈이다.
이어서 박 대통령이 언급한 것은 4대 부문 구조개혁이다.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계좌이동제, 자유학기제 등 논란 속에서 시행한 정책들을 성과로 나열했다. 하지만 정부가 만든 ‘경제혁신포털’ 누리집을 살펴보면, 이 정책들은 전체 구조개혁안의 일부에 불과하다. 철도· 물류 부문 2020년에 흑자 전환, 철도차량· 철도시설 안전강화, 임대주택의 주거복지 강화, 인터넷 종합은행 출범, 공교육 정상화 추진 등의 과제들은 달성이 요원하고, 당연히 연설에서 국정성과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4대 부문 중에 노동개혁은 야당의 반대로 아예 시행조차 하지 못했다. 내용이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4년으로 늘리고, 파견노동자의 범위를 넓히는 것 등으로 ‘개혁’ 이 맞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폐지했다”는 전속고발제 잔존
그 다음으로 언급한 내용은 2013년 11월18일 이후 대통령 연설에서 사라졌던 단어인 ‘경제민주화’다. 박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내실있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시행했다며 “전속고발제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와 “기존 순환출자의 99% 이상이 해소”됐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과는 달리 전속고발제는 엄연히 남아있다. 전속고발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위반되는 사안은 공정거래위원회만 고발할 수 있는 제도로 범죄 피해자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하고, 기업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수단이 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 제도의 폐지를 공약했으나, 인수위 시절에 전속고발제를 유지하되 감사원·중소기업청·조달청에 고발요청권을 주는 것으로 공약을 수정했다. 수정된 공약이 2013년 7월에 법률에 반영됐으나, 실효성은 거의 없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최명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올해 7월 공개한 자료를 보면, 세 기관이 공정위에 고발을 요청한 내역은 3년간 12건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청이 9건, 조달청이 3건, 감사원은 아예 고발요청을 하지 않았다. 공정위의 고발 건수나 비율에도 큰 차이가 없다. <2015년도 공정거래위원회 통계연보>를 보면 지난해 공정위는 4367건의 사건을 처리했고, 그 중에 고발은 56건으로 전체의 1.3%에 불과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현 정부가 확대한 것이 아니라, 축소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박 대통령은 당초 공약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공정거래법 전반에 적용하고, ‘반복해서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급하는 사업주’에게도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공약 역시 인수위의 국정과제에서 ‘하도급거래’ 중에서도 ‘부당단가인하·부당한 발주 취소·부당반품’에만 적용하고, 배상금 상한을 피해액의 3배로 제한하는 내용으로 변경됐다. 게다가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같은 소비자 피해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 요구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지난 7월 황교안 총리가 대정부질문서 밝힌 “남소(소송 남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전부다.
징벌제 손해배상은 되레 축소…지니계수 낮아져도 분배구조 악화
재벌 대기업의 “기존 순환출자의 99% 이상이 해소”되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이다. 청와대는 누리집에 ‘경제민주화 성과’로 2013년 4월 9만7658개의 순환출자 고리가 2015년 12월 94개로 줄었다고 제시했다. 숫자로 보면 엄청난 성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일부 재벌 대기업들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단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롯데그룹이 형제간 경영권 정리를 하면서 무려 9만5000여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줄였고, 나머지 2천여개는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누운 이후 계열사간 인수·합병이 활발한 삼성그룹에서 줄었다. 그런 두 그룹은 여전히 순환출자 구조를 지니고 있다.
경제민주화에 이어서 박 대통령은 대표 복지정책인 “기초연금과 맞춤형 기초생활급여를 도입한 결과 지니계수와 5분위 배율을 비롯한 여러 지표에서 분배구조의 개선이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니계수는 낮을수록 분배상황이 좋다는 의미다. 이 지표가 2012년 0.307에서 2015년 0.295로 감소했다. 하지만 지니계수의 한계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지적되고 있다. 전체 가구의 0.07%만 반영하는 표본조사의 특성상 정확성이 떨어지고, 소득공개를 꺼리는 자산가들의 소득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맹점이 있다. 또한 지니계수를 제외한 다른 지표들은 분배의 악화를 가리키고 있다. 국회 기회재정위 소속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번달 16일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소득 상위 10%가 가져가는 배당· 이자· 근로소득의 비중이 박근혜 정부 집권 내내 증가 추세다.
언급 안한 ‘진짜 문제’ 수두룩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예산안으로 추진하는 정책 역시 뚜렷한 한계점들이 눈에 띈다. 가령,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지원금을 인상”한다는 발언은 계획대로 추진 중이다. 이 제도가 처음 도입된 2013년에는 임금인상분의 50%를 지원했지만, 올해엔 70%까지 올랐다. 하지만 한도액이 월 60만원으로 그대로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의 사회보험 적용을 확대하겠단 공약도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박 대통령 시정연설의 진짜 문제는 언급되지 않은 것들이다. 기초연금 공약 수정을 시작으로 수많은 공약들을 파기한 것과 한국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 1300조원, 대중소기업간 격차, 확대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격차,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출산율과 자살율 등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솔직히 현황을 밝히고, 해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내년 대통령 신년사에 이런 내용이 담기길 바라는 것이 과도한 기대일까. 윤형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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