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국정과제 우선 순위 선별을
②재원대책·소요재원 밝히길
③공약 이행실적 투명하게 실토를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대개 두 부류다. 정치부에서 정당을 출입하거나, 경제부나 사회부 소속으로 정부부처를 출입하는 기자들이다. 이 두 부류의 기자들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서촌 근처에 있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란 곳에 모여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인다. 이곳 1층 기자실엔 약 100석이 있지만, 아침 8시쯤에도 자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자리경쟁 또한 치열하다.
5월31일로 출범 열흘째를 맞는 국정기획위에서 기자들이 주로 써 온 기사는 주로 각 정부 부처가 새 정부에 업무보고를 한 내용들이다. 이전 정부가 해온 정책의 방향을 뒤집지는 않을지, 새 정부의 공약을 얼마나 반영하겠다고 보고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김진표 위원장이 관료들에게 “기존 정책을 ‘표지갈이’하는 게 눈에 띈다”는 질책이나, 국정기획위가 반성문을 내라고 해서 난감하다는 공무원의 목소리, 혹은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이견 등 새 정부와 관료들의 갈등도 언론이 주목하는 편이다. 국정기획위는 어린이집 누리과정의 예산을 중앙정부가 부담하고, 고위공직자의 임용기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는 등 확정된 정책과 계획을 발표하며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진표(가운데) 국가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이 5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연수원에서 브리핑을 마친 뒤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그런데 지난 두 정부의 공약과 국정과제들의 이행과 파기과정을 추적하면서 <공약파기>란 책을 쓴 경험에 비춰보면, 국정기획위에서 이뤄지는 일상적인 발표와 취재활동에 회의감을 느낀다. 이전 정부의 인수위가 만든 국정과제들이 공약만큼이나 이행 실적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보통 선거 과정에서 나온 공약이 인수위에서 국정과제로 구체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만든 실행안이 정책이다. 인수위나 국정기획위에서 아무리 국정과제를 잘 만든다고 해도, 정부가 이를 정책으로 실행하지 않거나, 실효성 없이 생색내기용으로 이행하면 의미가 없다.
지난해 총선 엿새 전인 4월7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기간제 및 사내하도급 근로자 보호 가이드라인’도 이런 사례다. 이 가이드라인은 발표되자마자 ‘급조된 총선용 정책’이란 비판이 뒤따랐다. 직전에 예정에 없던 발표였을 뿐 아니라,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상시·지속적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 ‘전환된 근로자의 차별 금지’, ‘하도급 근로자의 차별 방지와 적정 도급 대금 보장’ 등을 현실화할 방안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당시 고용노동부가 밝힌 이행방안은 ‘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 서포터즈 35명이 활동하며 사업자들의 자율적 준수를 유도함’이 전부였다. 사실상 알아서 지키란 얘기였다.
발표 당시엔 “뜬금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던 이 가이드라인은 사실 공약과 국정과제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73쪽에 ‘상시·지속적 업무 정규직 고용 관행 정착’하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잠시, 이 공약의 의미를 되짚어 봤으면 좋겠다. 통계청 추산으로 644만명(2016년 8월 기준)인 비정규직 중 상시·지속적 업무에 해당되는 일자리는 공식 조사가 없긴 해도 절반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비정규직이 일시적 업무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고용형태가 아니라, 기업이 인건비를 줄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공약만이라도 제대로 이행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 성과를 역사에 남겼을 것이다. 물론 그런 역사의 기록은 남지 않았다.
현란했던 공약들 지난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거리에 내걸었던 대선공약 펼침막. 한겨레 자료사진
공약집의 고질적인 문제는 이런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상시·지속적 업무에 정규직 고용 관행 정착이란 공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공약집에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이라는 한 문장이 전부였다. 이것이 인수위에서 논의를 거쳐 국정과제에 담긴 구체안은 ‘비정규직 고용안정 및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제정이었다. 법률 개정이란 수단이 가이드라인 제정으로 바뀐 것이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의 발표는 인수위가 만든 국정과제의 실행안이었다. 이 가이드라인은 그나마 정책으로 이행되긴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다른 국정과제들은 어땠을까. 일례로 이 가이드라인은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가 발표한 140개 대표 국정과제 중에서 62번 과제인 ‘비정규직 차별 해소 및 근로자 생활보장’을 위한 10가지 세부과제 중의 하나였는데, 그 10개 중에 제대로 이행된 것은 대기업 고용형태 공시 도입과 두루누리 사회보험 사업의 확대 등 두 가지 정도다.
4년도 더 지난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를 되짚어 보는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위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국정기획위는 역대 인수위와는 달리 정부 주요 인사를 인선하는 작업을 맡지 않는다. 덕분에 국정기획위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을 구체화해 5년간 정부가 추진할 국정과제를 차분히 선별하고, 실행계획을 짜는 핵심 역할에 집중할 여건을 갖추고 있다. 정부부처의 업무보고가 일단락되면, 국정기획위는 한달여 동안 국정과제를 만드는 작업에 본격 착수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 이번 국정기획위에 당부하는 것은 단 하나, 책임감이다. 국정과제를 잘 만드는 것에 신경 쓰는 것처럼, 그 국정과제들이 잘 이행되는지 여부에 책임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국정기획위가 확실한 책임감을 보여주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국정과제 중에 우선순위를 선별하고, 꼼꼼한 재원대책을 수립하며 연도별로 주요 과제를 이행하지 않을 시 추가로 취할 조치를 밝히는 것 등이다. 박근혜 정부의 인수위는 140개의 대표 국정과제를 발표했고, 세부과제는 수백개에 달했다. 이번 국정기획위도 201개의 공약을 선별해 100개 안팎의 국정과제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냥 100여개의 국정과제를 나열하면 이 중에서 무엇부터 이행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100여개 과제 중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국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또한 국정과제별 소요재원과 조달 방안을 세세하게 밝히면 이행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참고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 보고서에는 과제별 소요재원이 얼마인지가 담기지 않았다.
공약과 국정과제의 이행 의지를 가늠하는 최종 잣대는 정부가 대통령 임기 반환점 등 특정 시점마다 주요 국정과제의 이행 실적을 점검해 투명하게 밝히고, 미진한 경우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고 미리 약속하는 것이다. 그 조치는 주무 부처의 인사 교체일 수도 있고, 정부가 가진 권한을 야당에 이양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자신들의 공약과 국정과제의 이행 실적을 솔직히 밝히면,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을 얻을 것이다. 이런 약속이 공약과 국정과제가 헛구호에 그치는, 정치가 늘 그들만의 권력다툼이라는 서민들의 자조가 바뀌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일단 국정기획위를 취재하는 나 자신부터 당장 나오는 발표뿐 아니라, 이곳에서 나오는 국정과제들이 향후 5년간 얼마나 이행되는지를 주시할 작정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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