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_윤형중의 윤중로 산책_‘이명박근혜의 공약파기史’ 공약파기#2
모든 후보가 약속한 택배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의무화
박근혜의 공약을 권성동·김진태가 막아세우고
홍준표 후보가 다시 공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공약 이행 여부 감시하려면 과거 파기 사례 살펴야 그런 의미에서 대선 후보의 공약이 선거 이후에도 중요합니다. 공약에는 후보들이 제시한 우리 사회의 변화상이 담겨 있습니다. 당선된 후보의 공약은 정책과제로 구체화되어 청와대와 각 부처에서 정책으로 집행하게 됩니다. 당선인이 지킬 마음과 의지도 없이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낙선한 후보의 공약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번 대선은 누가 당선돼도 여당의 국회 의석수가 적고, 야당의 의석수가 과반을 넘는 ‘여소야대’의 국회를 맞이합니다. 여야가 공통으로 공약한 내용은 야당으로서도 선거 이후에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이견이 있는 사안도 공약을 통해 ‘생각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공약을 살펴봐야 우리 사회의 미래상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공약에 대한 회의감도 상당합니다. 이런 회의감의 근원은 축적된 경험입니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공약은 선거 이후에는 무시해도 상관 없는 존재였습니다. 당선된 대통령의 공약 뿐 아니라, 여야가 공통으로 공약한 내용도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렇게 이행되지 않은 공약이 다음 선거에 다시 나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공약의 내용만으로는 이행 의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각 정당이 어떤 공약을 내세웠고, 그 공약과 관련한 법안·정책이 논의될 때 어떤 입장에 섰는지를 종합적으로 봐야 이행 의지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공약파기사’는 새 정부가 그리는 미래상을 가늠해보기 위해 대선에서 발표된 공약들과 그와 관련된 이전 정부의 공약 파기사례들을 유기적으로 엮어서 살펴볼 계획입니다. 그 첫번째 사례는 바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처우입니다. 특수고용직이란 용어 자체가 꽤 생경합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됐는데, 그냥 고용된 것이 아닌 애매한 사람들이란 뜻에서 ‘특수’란 말이 붙었습니다. 고용이란 표현을 빼고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부르든간에 이들은 누군가에게서 지시 받은대로 일하고 그 대가로 소득을 얻지만, 근로자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맺은 계약이 ‘근로계약’이 아니라 ‘도급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도급계약이란 사업자와 사업자 사이에 어떤 업무를 수행하기로 계약을 맺고, 그 수행 내역에 따라 경제적 보상을 하는 계약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특수고용직이란 근로자가 아니라 ‘사장님’이라 불리는 사업자라는 겁니다. 법적으로 근로자가 아니라 사장님이니 더 좋은 것이 아니냐구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아니고, 그에 준하는 경제적 지위나 처우를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자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죠. 대표적인 직종이 택배기사,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방문판매원, 골프장 경기보조원, 대형화물차 기사, 퀵서비스 기사, 대출모집인, 대리운전 기사 등입니다. 2017년 5월9일에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도 많은 대선 후보들이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후보마다 약속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약속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가입을 의무화하겠단 것이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를 제외한 네 당의 후보들은 이 내용을 공통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이들이 약속을 지킨다면, 누가 당선돼도 230만명에 달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사고·재해를 당하거나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어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같은 내용을 공약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있는 변화> 76쪽에 “특수고용직 근로자들은 사고 위험, 고용 불안으로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의 보호가 절실함에도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산재보험법 개정하여 특수고용직 근로자 적용대상 포함”하고 “특수고용직 근로자 현실에 맞는 고용보험제도 신설”을 약속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이 공약을 이행할 의지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한국노총 출신이자 당시 새누리당 소속의 최봉홍 전 의원이 발의한 ‘산재보험법 개정안’에 박 전 대통령의 공약이 담겼고, 이 개정안은 2014년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이완영 의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야 의원들이 찬성하는 가운데 통과됐습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보통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법률이 되기까지 국회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를 순차적으로 거치는데요. 이 법안은 법사위에서 당시 권성동, 김진태, 김회선 등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대로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한번 논의되고 사라졌습니다. 당시 이 세 의원이 내세운 주요 주장은 “산재보험을 의무적으로 하고, 민간보험을 또 선택적으로 하는 것은 옥상옥(지붕 위의 지붕이 얹힌 꼴)이 되는 셈”(김진태), “노동부의 입장이 특수형태근로종사자 여섯 개 직종에 대해 산재보험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그 다음에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고용보험 대상까지 확대하려는 취지로 이게(산재보험 의무화) 첫 단계”(권성동)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공약을 만드는 단계에서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다가 나중에 공약을 이행하는 단계에서 막아세운 행태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의 공약이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막혔는데도, 당시 새누리당의 지도부와 청와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공약을 이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도 이번 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은 다시 한번 특수고용직의 산재보험, 고용보험 가입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마침 이 공약의 발표 날인 지난 4월14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 있던 저는 공약을 발표한 김종석 선대위 경제산업본부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내용은 지난 대선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고, 해당 법안이 환노위를 통과했지만, 당시 여당 의원들의 반대로 법사위에서 막혔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공약으로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김 본부장이 답했습니다. “이 공약은 서민을 중시하는 홍준표 후보의 철학이 반영된 정책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다시 이 공약의 내용이 법안으로 나와도 여당 의원들이 반대 안 할겁니까?” 당연한 답변이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됩니다. 300만여명에 달하는 특수고용직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최소한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안전망인 산재보험에 이들이 가입하려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개정되어야 합니다. 3년 전 국회에서 이 법안의 통과를 막은 권성동 자유한국당(바른정당에서 복당) 의원은 법사위원장이고, 김진태 의원은 법사위 간사입니다. 상임위원장과 간사는 의사일정과 논의 안건을 정하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이들이 다시 안면몰수하고 홍준표 후보의 공약을 지키지 않겠다고 나오면, 사실상 법안을 통과시킬 방법은 ‘직권상정’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직권상정은 새 정부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죠. 과연 다음 정부는 택배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해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할까요? 차기 정부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를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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