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에 이어 지진해일(쓰나미)이 덮치면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모든 전원이 끊겼다. 원자로의 냉각수 공급 시스템이 멈췄다. 2011년 3월11일, 낮 3시37분이었다. 1시간 반만인 오후 5시께 원전 1호기의 원자로 노심(핵연료)이 녹기 시작했고 방사능 누출 위험이 커졌다. 통제불능 상태였다. 저녁 7시3분, 총리의 긴급사태 선언. 저녁 8시50분께 원전 2㎞ 이내 주민에 대피령이 떨어졌다. 속수무책이었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이후 며칠에 걸쳐 여러 차례 대피령이 이어져 대피 구역은 반경 20~30㎞까지 확대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해는 엄청났지만 주민대피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돼 그나마 주민의 피폭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원자로 통제불능 상태로 치닫는 이른바 ‘원전 중대사고’가 만일 국내에서 일어난다면 대응 조처는 제대로 진행될까? 초기대응의 실패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원전 주변에 사는 주민들한테 중대사고 때 대처하는 초기 행동요령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주민들은 답답한 불안감을 토로했다.
“주민대피 훈련이 잘 되고 있다고요? 누가 그런 얘길 합니까? 평생 주민 훈련에 참여한 적도 없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는데. 대피 때 모이는 집결지가 어디인지는 홍보용 책자에서 본 듯한데 정확하진 않고…, 다른 주민도 다들 비슷합니다.” 월성 원전이 집안에서도 보인다는 50대 ㄱ씨는 “보여주기 식으로 단체나 언론 불러놓고 방재훈련 행사 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주민들한테 대피 훈련 기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고리 원전에서 1㎞ 떨어져 사는 50대 ㄴ씨는 “주민 몇 사람이 참여하는 합동훈련에 참가한 적은 있다”면서도 “사고가 났을 때 바로 대처하려면 인근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대피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월성 원전에서 9㎞ 떨어진 마을의 60대 ㄷ씨는 ‘그 사람들의 방재훈련’에 목소리를 높였다. “원전 사람들과 지자체, 경찰, 소방관들이 방재훈련 하는 건 본 적 있다. 그 사람들은 훈련한다 치고, 사고 터졌을 때 주민은 대체 어떻게 대피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원자로 노심이 녹는데 냉각수 공급 작전은 실패하고 수소폭발마저 일어나 갖가지 핵종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에 누출되는 중대사고는 발생 확률이 극히 적지만 일단 일어나면 피해는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 때 피해를 그나마 최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
원전 위기대응 매뉴얼 있지만
원전주변 주민들 행동요령 ‘깜깜’
“훈련 해본적 없어” “집결지도 몰라”
보호구역 전체 주민훈련 절대 부족
실제 상황 대비해 평소 훈련 중요
“피폭 무관한 2차 참사도 대비해야”
현재 방사능 누출 사고와 관련해선 안전규제 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주축이 되는 ‘위기대응 매뉴얼’이 갖춰져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대폭 보강됐다. 매뉴얼을 보면, 방사능 누출 사고의 위험이 커지는 ‘청색 비상’ 단계에 이르면 정부는 ‘중앙’ 대책본부를 설치한다. 중앙 대책본부장은 차관급인 원안위 위원장, 현장 지휘센터장은 원안위 사무처장이 맡는다. 140여 명 전문인력의 원안위를 중심으로, 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자력의학원,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지방자치단체 등이 대응하는 체제다.
만일 사태가 더 심각해져 사고 원자로를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최고 단계인 ‘적색 비상’이 내려진다. 주민보호 조처가 시행된다. 주민대피령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현장 지휘센터장이 내린다. 사고 진행과 풍향·기상 정보 등을 종합해 방사능 확산을 예측하는 프로그램인 ‘아톰케어’(Atom-CARE)의 분석 결과가 주민보호 조처의 판단 때 중요한 구실을 한다.
많은 전문가는 대응 매뉴얼이 표준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라 혼란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실상황에 대응하려면 평소 연습과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원전 주변 주민은 실제 도움이 될 만한 훈련이나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2012년 국가방사능방재 연합훈련 장면. 원자력안전위원회 제공
그러다보니 행동요령과 관련해 혼란도 있다. 한 주민은 “대피 전에 마을회관으로 달려가 마스크와 방호복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말했으나, 원안위 방사선방재국 관계자는 “마스크와 방호복을 챙기기 위해 신속한 대피를 늦추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했다. 콘크리트 건물에 대피해 거리에서 피폭되는 시간을 줄이면서 사고 지역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다른 주민은 “집결지가 원전 쪽에 더 가까운 초등학교라 마을 뒤편 야산 너머로 도망가는 게 낫다”고 말해 비상시의 혼란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집결지가 어디인지, 갑상선 방호약품을 어디에서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최근 ‘주민대피 요령’ 소책자를 펴낸 녹색연합의 권승문 활동가는 “2012년 대피 훈련 참여 주민이 울진 연합훈련에선 400명, 고리 합동훈련에선 500명에 불과했다”며 “원전 10㎞ 이내에 사는 인구가 울진 주변 1만7000여 명, 고리 주변 5만8000여 명임을 감안하면 지금 주민보호 훈련은 크게 미흡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 국내에서도 여러 개선책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원안위 쪽은 “내년 시행을 목표로 주민대피 훈련을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추진안을 보면, 원안위가 원전 지역 4곳을 돌아가며 여는 주민 참여 훈련(연합훈련)을 그동안 5년마다 한 번 열었으나 앞으론 해마다 열기로 했다. 주민보호와 비상진료 훈련 등도 1~2년에 한 번씩 별도로 개최한다. 사업자인 한수원 쪽은 초기대응과 관련해 “124가지 재난대응 훈련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는데 올해엔 자연재난과 방사능재난을 포함하는 다중복합재난 시나리오를 추가로 개발하고 훈련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주민보호 조처 구역도 최근 늘어났다. ‘원전 8~10㎞ 이내’로만 지정됐던 방사선 비상계획 구역을 ‘예방적 보호조처 구역’(우선 대피)과 ‘긴급 보호조처 계획 구역’(필요시 대피)으로 나누고 범위를 각각 3~5㎞와 20~30㎞ 이내로 지정하는 개정 법안이 지난 2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원안위 쪽은 “새로운 주민보호 구역에 맞춰 방재 훈련·교육을 확대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이런 구역 확대가 예전보다는 개선됐지만 후쿠시마·체르노빌 사례로 볼 때 미흡하다는 논평을 내놓고 있다.
또한 차관급인 원안위 위원장이 중앙 대책본부장으로서 국가 재난에 충분히 대처할지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원전 재난의 성격이 단순한 방사능 누출을 넘어서 전면적이고도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후쿠시마 참사의 2차 피해를 보여주는 ‘후타바병원의 비극’을 예로 들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4.5㎞ 떨어진 후타바병원과 노인요양시설의 환자 440여 명과 의료진·직원은 사고 다음날인 3월12일 새벽 5시44분께 원전 10㎞ 이내 주민의 대피령이 떨어지자 피난에 나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일 낮 12시께 1차로 209명 환자가 차량을 타고 피난했다. 남은 환자 일부는 이틀 뒤에야 도착한 자위대 차량을 타고 피난길에 나섰는데 도중에 원전 3호기의 수소폭발이 일어나자 먼 길로 돌아가면서 노약자 환자 14명이 숨지는 사고가 났다. 병원에 의료진 없이 남은 환자들은 제대로 간병을 받지 못해 숨지는 사고가 이어졌다. 후타바병원과 노인요양시설의 사망자는 무려 50명에 달했다.
이 대표는 “후쿠시마 핵사고 때 비교적 신속한 주민대피로 당장의 피폭 사망은 없었지만 후타바병원 사례처럼 대피 과정에서 최약자인 환자들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며 예측하기 힘든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폭과 무관한 2차 참사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원안위를 넘어서는 총괄 지휘본부가 있어야 하며, 재난 대응체제에 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대도시를 낀 부산 기장군 고리 원전의 경우엔 원전 20㎞ 안에 55만 명, 32㎞ 안에 339만 명이 거주해, 비상시에 피폭 직접 피해는 물론이고 주민 대이동에 따른 사고를 최소화하려면 총괄적이고 다양하며 실제적인 대비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