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숙 인권위 조사관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삼일대로 국가인권위 건물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는 억울하고, 답답한 누군가의 사연이 모래알처럼 쌓인다.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 모래알처럼, 인권위 조사관의 캐비닛 안에 쌓인 사건은 사실 기각되거나 각하되는 사례가 많다. 지난해에도 접수된 진정 9287건 중 기각 또는 각하된 사건 수는 8651건으로, 90%가 넘는 사건은 인권위 조사대상이 아니거나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에 사건을 내민 사람을 만나 그의 울분, 분노를 마주하는 것은 인권위 조사관의 몫이다. 시민단체에서 인권보호 활동을 시작한 최은숙 조사관은 2002년부터 20여년간 인권위에서 일하며 쌓아둔 생각을 최근 <어떤 호소의 말들>(창비)을 펴냈다.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를 부제로 한 책에서 그는 결정문에 담지 못했거나, 여러 한계로 결정문 바깥에 남게 된 ‘호소의 말’을 담담하게 적었다.
“결정문이나 보고서의 세계는 명확성이 중요한데, 실제로 인권 침해를 받은 사람들의 호소나 억울함은 명확히 정리되기 어려워요. 조사 대상도 되지 못했거나, 화나고 뒤섞인 감정 탓에 자신의 억울함을 잘 설명해내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더 눈길이 가더라고요. ‘을’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눈빛을 볼 때면 울컥하는 맘도 들고요.”
지난 1일 서울 삼일대로 인권위 근처 카페에서 만난 최 조사관의 눈빛은 ‘을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책에는 우리 곁을 무심코 지나갔을 법한 평범한 이들의 속사정이 가득하다. 최 조사관은 검찰 조사를 받다가 고문으로 사망한 피의자의 6살배기 아들의 미래를 그려보았고, 경찰 조사 과정에서 “굴비 장수 주제에”라는 모욕을 들었던 진정인의 상처가 아물었을지 걱정했다. 출소 직후 또다시 강간죄로 구속된 피의자가 경찰에게 과잉진압을 당했다며 도움을 청했을 때, 피의자에 대한 분노가 일었던 순간도 털어놨다.
최 조사관은 10년 넘게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를 조사했지만, 결정문엔 싣지 못한 우리 사회 ‘장발장’들의 모습도 담았다. 그는 “조사관은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는지는 조사할 수 있지만, 실제로 피의자가 변호사를 선임할 여력과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며 “수사기관의 적법절차 원칙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본인이 한 잘못에 비례한 적정한 처벌을 받는 사회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실질적 정의이자 인권 문제 아닌가. 수백억대 횡령 사건 피고인은 집행유예를 받지만 일반 서민은 그렇지 않은 현실”이라고 말했다. 책에서 일용직 남성이 가벼운 법 위반으로 하루치 일당을 벌금으로 물게 생긴 사연과 통조림 두 통을 훔친 혐의로 구속된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러한 고민과 닿아있다.
알려지지 않았던 인권위의 잘못도 꺼냈다.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으로 무고한 소년이 붙잡혀 10년형을 받았지만 인권위는 본연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2003년 경찰이 진범을 체포하자 한 인권활동가가 소년을 대신해 인권위에 진정을 냈음에도 사건은 1년 넘게 방치되다가 각하됐다. 그 뒤 10년이 지나 이 사건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가 인권위에 법원 의견서 제출 등 의견 표명을 요청했을 때도 침묵했다. 그때 한 인권위원이 “인권위가 의견을 내면 특정 변호사의 대리인 노릇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한 주장을 다른 인권위원들이 받아들인 탓이었다. 최 조사관은 “인권위가 법원에 의견 표명을 할 권한이 있는데, 그조차 하지 않은 것이 분노스러웠다. 만약 내가 피해자였다면 인권위를 많이 원망했을 것 같다. 피해자는 그마저도 항의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인권위가 사회적 비난을 받았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정치적인 현안과 관련된 인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인권위는 때로 공격 대상이 되거나 비판에 직면한다. 지난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과 관련한 인권위 대응과 조사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최근 ‘수요시위를 적극 보호하라’는 인권위 권고에 보수단체는 ‘직권남용’이라고 고발하기도 했다.
인권위 창립 직후부터 일해온 최 조사관은 독립기구로서의 인권위의 권위를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모 아니면 도’ 또는 네 편 내 편으로 나누는 극단화가 심해지고 있다. 인권위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순간 사안을 인권적 차원에서 보기 어려워지고,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럴수록) 인권위를 독립적인 존재로 봐야 한다. 예산도, 인력도 부족한 인권위가 독립성마저 없으면 존재 이유 자체가 없다”고 했다.
또한 누구나 인권을 말하지만, 혐오의 언어가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의 탈을 쓰고 퍼지듯, 최 조사관은 ‘인권’의 오용을 경계한다. “‘인권’이라는 말이 가치를 많이 잃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인권으로 생각하기도 해요. ‘집 열 채를 가진 내 재산권도 인권’이라거나 ‘혐오 표현을 할 자유도 나의 권리’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집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우리가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는 것이 인권인데도요. 인권 개념에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수단으로 인권을 말하진 않아야 합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사진 김경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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