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삼각지역에 설치된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를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너 죽고 나 죽자’는 말, 이런 말을 들어보지 않은 장애인 자녀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을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제가 중학생 때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께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그 끝은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리 없이 죽어간 (나의) 동료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말문을 열자 주변에 있던 전국장애인부모연대(부모연대) 회원 30여명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한 달 사이 발달장애인 지원 대책을 요구하며 단체로 두차례 삭발을 한 탓에 일부 엄마들의 머리는 아직 짧았다. 김 의원의 말을 숨죽이고 듣던 이들은 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김 의원과 장애인 자녀 부모들이 27일 서울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개찰구 인근에 마련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에서 얼굴을 맞댔다. 최근 연달아 일어난 장애인 가족의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다.
전날 부모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최근 연이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장애인 가족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과 가까운 이곳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앞서 지난 23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 화단에서 40대 여성과 발달장애가 있는 6살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날 인천 연수구의 한 아파트에서도 뇌병변 1급 중증장애인 30대 딸에게 수면제를 먹여 숨지게 한 혐의로 6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3월에도 경기도 수원과 시흥에서 각각 발달장애인 자녀를 살해한 혐의로 부모가 체포됐다.
김 의원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던 분들에 대해 우리 모두 관심 갖고 함께해야 할 때이다. 우리의 존엄은 누가 챙겨주지 않는다.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여러분들의 작은 목소리, 소리 없는 아우성을 중간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며 이 자리에 섰다. 항상 ‘준비된 가해자’여야 하는 (장애 부모의) 입장을 왜 이해 못 하겠는가. 이제는 우리가 어려움을 나누겠지만 어떤 상황에도 살인은 이해되어선 안 된다”고도 했다.
27일 오후 5시께 장혜영 정의당 의원과 조성주 정의당 마포구청장 후보가 서울 삼각지역에 설치된 발달장애인 추모 분향소를 방문했다. 박지영 기자
이날 오후 5시께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분향소를 찾아 부모연대 회원들을 만났다. 장 의원은 “지난달 19일 청와대 앞에서 (부모들이)550여명이 같이 삭발할 때 분명히 새 정부에게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한 달이 지나고 같은날 서울과 인천에서 발달장애인 자녀가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부모도 떠난 참변이 일어났다. 과연 발달장애인에게 ‘국가가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계속 자유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과연 이 사람들에게 자유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장애인들에게도 민주주의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발달장애인·중증장애인 부모들은 입버릇처럼 “내가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장애 자녀의 돌봄을 개별 가족에 전가하는 현재의 복지체계에서 부모의 부재는 장애인 자녀에게 생존의 위협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모연대 회원들은 지난달부터 삭발식과 단식농성 등을 통해 정부에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도 지난 3일 국정과제를 공개하며 발달장애인 정책을 발표했지만, 부모들은 공약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정정애(51·부모연대 서울지부 용산지회장)씨는 “한 달 전 삭발하고 나서 머리를 곱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또 시청 앞에서 규탄 대회를 열고 머리를 또 잘랐다. 머리 기를 겨를이 없다.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발달장애인 가정이 많은데 ‘시민들을 위한다’고 했던 대통령은 일언반구 한마디가 없다. 이런 현실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후 부모연대 서울지부 회원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발달장애인 지원을 촉구하는 삭발식을 진행했다. 김수정 서울장애인부모연대 회장은 “정부가 발달장애인 지원체계에 관한 청사진을 뚜렷하게 제시하면 장애가 있어도 절망적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발달장애인 가족들에 대한) 지원 로드맵조차 안 보인다. 곱고 이쁜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지 않도록 정치권과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 대표도 “다음에 또 누군가가 죽어서 또 조문을 하고, 국가 책임을 또 외치는 일은 단연코 없어야 한다. 더이상 이렇게 (장애인 가족이) 죽을 순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 의원은 “항상 우리의 목소리는 나중에 반영된다. (정책 수혜를) 직접 받을 사람들의 입장이 먼저 반영되도록 여러분의 귀와 입, 손이 되겠다”며 “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는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에 있다. (이것이) 자리잡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 장 의원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 찾아와서 정치의 책임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죄하고 그리고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게 정말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같은 날 ‘가족의 종말’ 선택한 장애 자녀 부모…“국가는 없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44183.html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박지영 기자
jy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