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회고록 <평화의 힘> 낸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이 30일 오전 서울 신촌동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연구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실, 별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함께 일했던 분들이 현 정부 들어 이런 저런 고초를 당하고, 지난 5년(문재인 정부)의 시간을 폄훼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필을 시작한 거죠.”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평화기획비서관과 외교부 제1차관을 지난 최종건(49)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달 출간된 문재인 정부 5년 간의 외교·안보 정책을 재구성한 책 <평화의 힘>(메디치)를 집필한 이유를 “지금 상황에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훈 (국정)원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님 등이 사법의 칼날 위에서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검찰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기소하고 재판에 회부했지요. 윤석열 정부는 우리가 추진했던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가짜 평화’라며 무차별적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최 교수는 지난달 30일 <한겨레>와 만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진 기억과 경험이 나 혼자만의 사유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책의 출간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문 전 대통령은 3일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의 평화관, 평화를 위한 쉼 없는 노력, 성과와 한계, 성찰 등에 관해 언젠가 제가 회고록을 쓴다면 담고 싶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적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북-미 정상이 서로 막말을 주고 받으며 전쟁 직전까지 갔던 2017년 한반도 정세가 2018년 ‘대화 국면’으로 극적 전환을 이후는 과정, 2장엔 그가 직접 담당했던 9·19 남북군사합의 체결을 둘러싼 비화 등이 담겼다. 3장에선 2019년 2월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 원인을 당시 한국 정부의 시선으로 재구성했고, ‘대통령과 평화’란 제목이 붙은 4장에선 윤석열 대통령과 문 전 대통령의 언어를 비교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추진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직접 실행한 이의 기술답게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일화가 담겨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전 정부 평화비서관·외교1차관
지난 5년 외교·안보정책 담은
책 ‘평화의 힘’ 지난달 출간해
문 전 대통령 “내가 쓰고픈 내용”
“미, 북 제안 ‘영변카드’ 받았어야
평화세력, 젊은 세대로 확장 필요
윤 대통령 냉전적, 대책 없는 언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북-미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던 2017년 9월23일에 대한 묘사다. 이날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미국의 초음속 폭격기 B-1B 폭격기 2대와 F-15 전투기 편대가 위도상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100㎞ 지점까지 북상했다. 동해의 국제공역이었지만, 풍계리 핵실험장이 200㎞이내로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미국의 폭격기가 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북방한계선 위로 올라갔다는 것은 반나절 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미국이 따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수 있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북-미가 서로에게 말 폭탄을 쏟아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문 전 대통령만이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8·15 경축사)이라며 평화를 외쳤다. 남북 정상은 그로부터 불과 일곱달 뒤인 2018년 4월27일 거짓말처럼 판문점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두 정상은 판문점 도보다리 위 군사분계선 101호 표식물 왼쪽에 마련된 탁자에서 배석자 없이 30분 가량 사실상 단독 회담을 하며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자신의 여러 전략적 우려 사항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미국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트럼프 대통령과 신뢰 있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고 해요. 또 앞으로 대통령님과 지속적으로 협조하고 소통하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회고록 <평화의 힘> 낸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이 30일 오전 서울 신촌동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연구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최 교수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이 제시한 영변 카드를 받아들였다면 한반도 상황이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속 터지죠. 영변은 여의도의 두 배 만한 지역입니다. 기숙사를 포함해 298개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영변을 비핵화한다고 미국이 곡괭이를 들고 가서 부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북한의 도면을 갖고 이것을 직접 만든 북한 핵기술자들과 함께 철거해야 합니다. 이곳은 북한 핵 시설의 ‘신경 조직’이고, 미국과 함께 철거 작업을 하는 이들은 영변 이외의 제2, 제3의 비밀 핵시설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20여년에 걸쳐 철거 작업을 하다 보면, 북한의 핵 계획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거꾸로 북이 왜 영변을 먼저 내놨을까 생각해 보면, 이것을 내놓아야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가 선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대통령이 세상에 내놓는 ‘말의 중요성’이었다. 책에는 고심고심하며 자신이 내놓을 말을 다듬는 문 전 대통령의 모습이 곳곳에 묘사돼 있다. “문 대통령님이 2018년 9월19일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15만명의 시민을 앞에 두고 했던 연설과 윤석열 대통령님이 자유총연맹 69주년 기념식을 맞아 장충체육관에서 했던 연설을 비교해 보세요. 너무 대조적입니다. 역사는 누구의 연설을 더 오래 기억할까요. 전자엔 평화, 비핵화, 반전에 대한 의지와 한반도 공동체 의식을 주장하는 매우 포용적이고 매우 헌법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장충체육관 연설은 냉전적 연설이었고, 기본적으로 (남북 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지) 대책이 없는 연설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종전선언을 추진했던 문재인 정부를 “반국가 세력”이라 규정했다. “당분간은 남북 관계에서 할 게 없을 겁니다. 반국가세력으로 규정된 우리 평화세력은 내부 결속을 하면서 정부 비판을 넘어 비핵화와 평화에 대한 여러 대안을 준비해야 합니다. 또 젊은 세대로 확장도 필요합니다. (지난해 10월) 임동원 선생님(전 통일부 장관) 자서전 <다시 평화> 출판 기념회 갔더니 제가 제일 막내더군요.”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