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반대 시위 중인 박그림 녹색연합 공동대표.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지난 17일,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서울 광화문 광장, ‘녹색 치마’가 나뭇잎처럼 팔랑거렸다. 녹색 치마는 가방을 뒤적여 동그랗게 말아둔 손팻말을 꺼냈다. 펴고 접을 수 있는 휴대용 반사판을 활용해 만든 팻말 앞 뒷면엔 각각 ‘설악산 케이블카 취소하라’, ‘이러다 다 죽는다’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나흘 전, 국립공원공단은 ‘설악산국립공원 오색 삭도(케이블카) 사업’ 시행 허가를 내렸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최종 행정절차가 마무리 된 것이다.
녹색 치마를 입고 이날 1시간가량 1인 시위에 나선 이는 31년째 이 사업을 반대하고 있는 박그림(75) 녹색연합 공동 대표다. 박 대표는 1992년부터 오색 케이블카 반대 운동을 해왔다. 그는 “치마는 모든 걸 품을 수 있고, 녹색은 생명과 평화를 의미”한다고 여겨, 2000년대 후반부터 녹색 치마를 입었다.
한떄 녹색 치마를 벗었던 때도 있었다. 2019년 9월, 환경부가 이 사업의 환경영향평가서에 대해 최종 부동의 결정을 내렸을 때다. 그때만해도 지인들이 직접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던 여러 벌의 녹색 치마를 다시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2022년 봄,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승인’을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며, 녹색 치마는 다시 옷장 밖으로 나왔다. 박 대표는 주말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어딜 가든 녹색 치마를 둘러 입고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단풍으로 나뭇잎이 붉게 물든 설악산 끝청봉 인근. 양양/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오색 케이블카가 설치될 구간은 설악산 국립공원 내 오색지구부터 설악산 주봉인 대청봉 왼쪽 봉우리인 끝청(해발 1480m) 사이 3.3㎞ 구간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환경부가 사업을 백지화하며 40년 가까이 진행돼온 찬반 논쟁이 끝나는 듯 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며 다시 사업 추진 쪽으로 속도가 붙었다. 지난해 3월 한국환경연구원을 포함한 5개 환경영향평가 전문 검토기관들이 모두 부정적인 의견을 냈음에도, 환경부는 올해 2월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조건부 협의’ 의견을 냈고 뒤이어 국립공원관리공단 이 지난 13일 시행 허가를 내주며 모든 인허가 절차가 마무리됐다.
삽을 뜨는 일만 남은 지금, 박 대표 얼굴엔 ‘실망’의 기색 따윈 없었다. “(오색 케이블카 사업 반대는) 환경운동이 아니라 내 삶이다. 운동이라고 얘기하면 결과를 따지게 되고,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포기하지 않나.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되든 안 되든 어차피 끝까지 가는 게 삶이다. 사니까 계속 싸우는 거다.” 박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31년째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2천년대 들어 녹색치마 입고 시위
4년 전 ‘환경부 부동의’에 옷장 보관
“사업 승인” 윤석열 대통령 당선 뒤
녹색치마 다시 입고 매일 1인 시위
모든 행정절차 마무리돼 착공 앞둬
“권금성 케이블카로 민둥 바위산 돼
사람들 몰리면 환경 초토화 불가피”
강원도 양양군의 사업개요에 따르면, 설악산국립공원 내 면적 8만672㎡에 오색 케이블카 상·하부 정류장과 지주 등이 설치된다. 녹색연합은 국립생태원이 낸 환경영향평가서 재보완 검토 의견과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서 협의 내용 등을 통해 이 구간 내에 있는 수령 200년 이상 나무를 포함해 수목 1721주가 훼손되고, 멸종위기종인 산양·하늘다람쥐 등을 포함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는 인원은 연 25만~30만명 수준이다. 양양군은 케이블카가 설치되면 2030년까지 이용객이 연 123만명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 대규모 탐방 압력에 따른 토양 유실과 식생 훼손이 심각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박 대표는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보면 풀숲이었던 곳이 이제 민둥 바위산이 됐다”며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실어올리니 (환경이) 초토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박그림 녹색연합 공동대표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설악산은 천연보호구역, 백두대간보호지역,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등으로 지정돼 이중삼중으로 보호되고 있어 케이블카 사업 허가 조건이 가장 까다로운 곳으로 꼽혀 왔다. 박 대표는 “설악산에서 (새로운) 케이블카 공사가 시작되면, 이미 케이블카 사업을 준비 중인 지리산 등 (국립공원이 있는 여러 지역에서) 너도나도 개발하겠다고 나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케이블카의 경제적 유발효과를 넘어 일각에선 케이블카 설치가 장애인이나 노년층 등 산에 올라가기 힘든 계층의 이동 편의를 증진한다며 옹호론을 펴기도 한다. 박 대표는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인 이동권도 보장이 안 돼 있는 상황에서, 케이블카만 설치한다고 해결이 되겠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실제로 설악산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으면 “케이블카 찬성”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다. 그럴 땐 왜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안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게 해결책이다. “설명을 들으면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결국 소리치던 사람들이 동조한 사람들한테 등짝을 한 대씩 맞고 산에 올라간다.” (웃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