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아, 좀, 만지지 말란 말이에요”

등록 2017-11-17 20:05수정 2017-11-17 23:01

[토요판] 박현철의 아직 안 키우냥
12. 보들이에게서 온 편지

텔레비전 뒤쪽에 숨은 보들이. ‘그 발 안 치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텔레비전 뒤쪽에 숨은 보들이. ‘그 발 안 치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들이에요. 저는 지난 9월17일에 생일이었는데요, 라미 언니가 자기도 편지 썼다면서 저한테도 쓰라고 했어요. 라미 언니는 반말로 썼던데, 저는 반말할 줄 몰라요. 집사한테 처음 편지 쓰는 거니까 높임말로 해야 할 거 같아요.

저는 집사랑 라미 언니랑 같이 살게 돼서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이전에 살던 집은 지금 집보다 훨씬 컸어요. 거기엔 소파도 훨씬 크고 캣타워도 훨씬 많고 캣타워 사이를 걸어갈 수 있는 공중에 달린 길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엄마 아빠도 있고 언니 오빠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심심할 일도 없었는데, 그런 게 좀 아쉬워요.

대신 지금 집에 와서 좋은 것도 있어요. 저랑 라미 언니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인사도 먼저 하고 귀엽다고 말도 해줬어요. 지난번 집엔 워낙 고양이들이 많이 사니까 그 집 집사는 퇴근하고 와서 밥 주고 물 주고 화장실 청소하고 나면 힘들어서 뻗어버렸어요. 집사랑 눈 한번 못 마주치는 날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전 혼자 조용히 노는 걸 좋아해요. 라미 언니랑은 완전 반대예요. 캣타워 젤 꼭대기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고 거기 앉아서 날파리들 눈으로 쫓는 것도 좋아해요. 라미 언니가, 집사 말로 ‘환장’하는 깃털에도 별 관심 없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좀 만지지 마세요. 제가 만져달라고 하기 전엔 저 좀 제발 만지지 마세요. 막 껴안고 들어 올리고 이런 것도 하지 마세요. 그러면 손이 닿았던 덴 빠짐없이 그루밍해야 해요. 그나마 요즘엔 집사는 이걸 좀 알아챈 거 같아요. 저번엔 병원에서 수술하고 난 막 아픈데, 목에 찬 넥칼라 때문에 물이랑 밥도 잘 못 먹는데, 집사는 귀엽다고 날 막 만지고 껴안고 그랬어요. 괴로웠어요.

다른 보모 이모들한테도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진짜 하고 싶었어요. 라미 언니가 워낙 사람들한테 잘 비비고, 만져주는 걸 좋아해서 고양이들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발톱 깎는 거나 약 먹는 거나 양치질하는 것도 사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라미 언니 보니까 정말 장난 아닌 거예요. 막 소리 지르고 발톱 세우고, 집사 팔 다 긁고. 엄마 아빠가 같이 사는 집사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집사가 나 싫어해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그래서 어지간하면 전 가만있어요. 그러다 가끔 저도 좀 하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도 가만있어야 하니까 좀 속상하긴 해요.

전 캔사료도 좋아하지만 건사료도 좋아해요. 간식은 주면 좋은데 안 줘도 상관없어요. 배고프면 밥 줄 때까지 자면 되거든요. 그래서 전 라미 언니처럼 집사가 뭐 먹을 때 가까이 가지도 않아요. 전 집사가 싫어하면 안 해요. 전 지금 있는 캣타워도 좋아요.

라미 언니가 그래도 생일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했어요. 라미 언니가 다 말해서 더 없는데…. 음, 저는 좀 구석지고 그렇다고 그렇게 춥지 않은 그런 데가 집안에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텔레비전 뒤 말고는 숨을 데가 없어요. 전 라미 언니처럼 높은 데를 잘 올라가지 못하니까 그런 숨을 만한 데가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아 마지막으로, 라미 언니랑 집사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라미 언니가 사고 쳐서 집사 기분 나쁘게 하면 나도 눈치 보이거든요. 전 조용한 게 제일 좋아요. 그게 다예요.

라미 동생 보들이가 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법원 “이재명 공직선거법 1심 선고 생중계 안 한다” 1.

[속보] 법원 “이재명 공직선거법 1심 선고 생중계 안 한다”

[단독] 명태균이 받았다는 ‘김건희 돈’ 어떤 돈...검찰 수사 불가피 2.

[단독] 명태균이 받았다는 ‘김건희 돈’ 어떤 돈...검찰 수사 불가피

대법 판례 역행한 채…경찰, 윤 퇴진 집회 ‘과잉진압’ 3.

대법 판례 역행한 채…경찰, 윤 퇴진 집회 ‘과잉진압’

엄마, 왜 병원 밖에서 울어…입사 8개월 만에 죽음으로 끝난 한국살이 4.

엄마, 왜 병원 밖에서 울어…입사 8개월 만에 죽음으로 끝난 한국살이

아이돌이 올린 ‘빼빼로 콘돔’…제조사는 왜 “죗값 받겠다” 했을까 5.

아이돌이 올린 ‘빼빼로 콘돔’…제조사는 왜 “죗값 받겠다” 했을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