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현철의 아직 안 키우냥
12. 보들이에게서 온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보들이에요. 저는 지난 9월17일에 생일이었는데요, 라미 언니가 자기도 편지 썼다면서 저한테도 쓰라고 했어요. 라미 언니는 반말로 썼던데, 저는 반말할 줄 몰라요. 집사한테 처음 편지 쓰는 거니까 높임말로 해야 할 거 같아요.
저는 집사랑 라미 언니랑 같이 살게 돼서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이전에 살던 집은 지금 집보다 훨씬 컸어요. 거기엔 소파도 훨씬 크고 캣타워도 훨씬 많고 캣타워 사이를 걸어갈 수 있는 공중에 달린 길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엄마 아빠도 있고 언니 오빠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심심할 일도 없었는데, 그런 게 좀 아쉬워요.
대신 지금 집에 와서 좋은 것도 있어요. 저랑 라미 언니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인사도 먼저 하고 귀엽다고 말도 해줬어요. 지난번 집엔 워낙 고양이들이 많이 사니까 그 집 집사는 퇴근하고 와서 밥 주고 물 주고 화장실 청소하고 나면 힘들어서 뻗어버렸어요. 집사랑 눈 한번 못 마주치는 날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전 혼자 조용히 노는 걸 좋아해요. 라미 언니랑은 완전 반대예요. 캣타워 젤 꼭대기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고 거기 앉아서 날파리들 눈으로 쫓는 것도 좋아해요. 라미 언니가, 집사 말로 ‘환장’하는 깃털에도 별 관심 없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좀 만지지 마세요. 제가 만져달라고 하기 전엔 저 좀 제발 만지지 마세요. 막 껴안고 들어 올리고 이런 것도 하지 마세요. 그러면 손이 닿았던 덴 빠짐없이 그루밍해야 해요. 그나마 요즘엔 집사는 이걸 좀 알아챈 거 같아요. 저번엔 병원에서 수술하고 난 막 아픈데, 목에 찬 넥칼라 때문에 물이랑 밥도 잘 못 먹는데, 집사는 귀엽다고 날 막 만지고 껴안고 그랬어요. 괴로웠어요.
다른 보모 이모들한테도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진짜 하고 싶었어요. 라미 언니가 워낙 사람들한테 잘 비비고, 만져주는 걸 좋아해서 고양이들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발톱 깎는 거나 약 먹는 거나 양치질하는 것도 사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라미 언니 보니까 정말 장난 아닌 거예요. 막 소리 지르고 발톱 세우고, 집사 팔 다 긁고. 엄마 아빠가 같이 사는 집사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집사가 나 싫어해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그래서 어지간하면 전 가만있어요. 그러다 가끔 저도 좀 하기 싫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도 가만있어야 하니까 좀 속상하긴 해요.
전 캔사료도 좋아하지만 건사료도 좋아해요. 간식은 주면 좋은데 안 줘도 상관없어요. 배고프면 밥 줄 때까지 자면 되거든요. 그래서 전 라미 언니처럼 집사가 뭐 먹을 때 가까이 가지도 않아요. 전 집사가 싫어하면 안 해요. 전 지금 있는 캣타워도 좋아요.
라미 언니가 그래도 생일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했어요. 라미 언니가 다 말해서 더 없는데…. 음, 저는 좀 구석지고 그렇다고 그렇게 춥지 않은 그런 데가 집안에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텔레비전 뒤 말고는 숨을 데가 없어요. 전 라미 언니처럼 높은 데를 잘 올라가지 못하니까 그런 숨을 만한 데가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아 마지막으로, 라미 언니랑 집사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라미 언니가 사고 쳐서 집사 기분 나쁘게 하면 나도 눈치 보이거든요. 전 조용한 게 제일 좋아요. 그게 다예요.
라미 동생 보들이가 씀
12. 보들이에게서 온 편지
텔레비전 뒤쪽에 숨은 보들이. ‘그 발 안 치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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